1. A감독은 감독 첫해인 1984년 전후기 합산 58승 1무 41패로 0.586의 6개구단 최고승률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이 후기리그 우승팀으로 상대적으로 까다롭지 않은 롯데를 택하기 위해 져주기 경기를 하여 한국시리즈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0.550의 삼성과 0.510의 롯데의 한국시리즈는 롯데의 우승으로 끝났습니다.

몇 년 후 10년 감독 운운했던 구단은 L감독 임명을 위해 A감독을 경질합니다.

1984년 당시 A감독 밑에서 포수로 뛰었던 모 선수는 20여년 후 다른팀 감독이 되어, 도리어 A감독이 1984년 삼성과 같이 한국시리즈 상대 정하기를 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습니다.

20여 년 전과 달리 A감독의 져주기 경기는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2. I지역의 어느 팀은 0.188로 꼴찌, 0.525로 6개팀 중 3위(정규시즌 100경기에서 30승 16패 6세이브 36완투 427 1/3이닝을 기록한 선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0.392로 꼴찌, 0.358로 꼴찌, 0.302로 6위(7위이자 꼴찌는 신생팀이었습니다.), 0.389로 꼴찌, 0.319로 꼴찌를 하는 등 창단 이후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B감독은 그 팀을 맡아 첫해 0.533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습니다.

그러나 1년 후 B감독은 그 팀의 스타출신 노장 선수를 지키기 위해 각서까지 쓰며 구단과 다투다 공항에서 “감독 경질”이 적힌 신문을 보게 됩니다.





3. 뒤늦게 창단된 어느 팀은 0.425로 7위, 0.329로 8위, 0.361로 7위, 0.393로 8위, 0.369로 8위를 하는 등 창단이후 한 번의 예외도 없이 7과 8만 친한 팀이었습니다.

C감독은 그 팀을 맡아 첫해 0.563 3위, 두번째 해 0.571 3위 등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습니다.

팀의 재정난으로 여관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사비를 털어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였고, 그러다 신장 하나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C감독은 구단해체를 몇 개월 앞두고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10년 후 모 신문의 모 기자는 기사로 신장이 하나 없는 C감독의 콩팥 기능 악화를 소변징크스와 연관지으며 1위를 달리는 C감독의 야구마저 비아냥거립니다.





4. 9승 25패 0.265 압도적인 8위를 기록하던 팀이 있었습니다.

D감독은 시즌 도중 감독대행으로 그 팀을 맡아 그 해, 그 다음 해 모두 0.500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습니다.

정식감독이 된 첫 해 D감독은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습니다.

2승 3패로 밀리던 한국시리즈 6차전 D감독의 팀은 9회말 1아웃까지 9대 6으로 앞섰습니다.

단 두 타자만 처리하면 3:3의 균형을 맞추고 분위기를 역전 시킬 수 있었습니다.

1아웃 1, 2루가 되었고 타석에는 한국시리즈 20타수 2안타의 상대 타자가 들어섰습니다.

20타수 2안타의 X타자는 동점 3점 홈런을 쳤습니다.

뒤이어 나온 Y타자는 한국시리즈 끝내기 연속타자 홈런을 쳤고, D감독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준우승 후 D감독은 남은 임기 1년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훈련과 계획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D감독은 한국시리즈 직후 “어느 팀 야구가 아니었다”는 비아냥을 듣고 계약기간이 남았음에도 경질됩니다.
팬들이 버스를 동원해 그룹 본사와 농구팀 경기장을 방문하여 같은 계열사 프로농구팀 감독을 향해 “우승을 못하면 짤리니 꼭 우승하라”는 플래카드를 거는 등 항의를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준우승을 한 D감독의 자리는 프런트를 장악한 어느 대학 인맥의 L감독(같은 해 6위를 함)이 차지하게 되었고, 다음해 L감독은 6위를 기록합니다.

115승 13무 88패 0.528의 성적을 올린 D감독은 현재까지도 구단 역사상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한 감독이며, D감독 경질 후 구단은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5. 프로야구 감독 출신의 E감독은 프로야구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인 야구 등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그러다 D감독은 자신의 첫 우승을 막았던 X타자의 일본 진출을 돕기 위해 일본 구단의 코치가 되었고, X타자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X타자가 타팀으로 이적하자 한국에 돌아와 다시 프로야구 감독이 된 D감독은 올스타전 감독으로서 자신의 첫 우승을 막았던 Y타자가 1군과 2군을 오가는 성적이었음에도 파격적으로 4번타자로 기용했고, Y타자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6.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창단 이후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I지역의 신생팀이 있었습니다.

F감독은 그 팀을 맡아 감독 첫 해, 팀의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F감독은 감독 두 번째 해에도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팬들은 F감독이 경질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어느 팬들은 F감독이 우승을 하지 못하면 경질될 거라고까지 말합니다.





7. A, B, C, D, E, F감독은?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 - 10점
정철우 지음/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2008년 8월 11일에 쓴 글입니다.)

Posted by 파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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