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 피도 눈물도 없다?


1. 조범현과 김성근 감독(1976년~1979년 충암고등학교 감독, 1982년~1983년 OB베어스 코치, 1984년~1988년 OB베어스 감독, 1991년~1992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6년~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2000년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1977년 7월 서울 운동장(동대문 야구장)에서는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전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전국대회 4강에 들면 체육특기자 자격으로 대학 진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8강전은 또다른 의미의 결승전이었습니다.

선수가 부족해 김성근 감독이 전국을 돌며 해체된 야구부의 선수들(대구 대건고 조범현 등)을 모조리 영입할 만큼, 충암고등학교는 약한 팀이었습니다.

그 충암고등학교가 황금사자기 8강전에서 신일고등학교를 상대로 9회말 1아웃까지 2대 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2타자만 처리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상황, 충암고등학교 에이스 기세봉은 안타 하나 맞지 않고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충암고등학교는 신일고등학교 양승호(롯데 자이언츠 감독, 전 LG트윈스 감독대행), 박종훈(LG트윈스 감독)에게 연속안타를 허용하고 김남수에게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맞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우리 우짜노. 대학 우찌 가노”

특히 3학년 주전포수 조범현(기아 타이거즈 감독)은 포수 마스크도 벗지 못한 채 관중석까지 들릴 만큼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충암고등학교 김성근 감독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감독 인생 첫 눈물이었습니다.


대회가 하나 남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제자들을 꼭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말 같은 8강전 끝내기 3점 홈런 역전패, 눈물의 8강 전 다음날 새벽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을 그라운드로 불렀습니다.


‘전국대회 4강 = 대학 입학’ 규정은, 반대로 전국대회 4강에 들지 못한 선수들에게는 대학 입학 불가, 대학 입시 불합격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기적적으로 올라온 8강전, 9회말 1아웃까지 노히트노런으로 앞서다 끝내기 3점 홈런을 맞고 역전패를 당한 약팀의 어린 선수들은 말할 수 없는 상실감,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충암고등학교 선수들은 소위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해체된 야구부의 선수들을 많이 영입한터라 선수들 간의 갈등도 심했습니다.

병원 치료를 요할 만큼 선수들 간의 다툼이 심했습니다.

선수들이, 제자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김성근 감독은 경찰서로 병원으로 다니며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남은 대회인 봉황대기 4강 진출을 위해 새벽부터 강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때는 주전보장, 대학진학 등을 빌미로 거액을 챙기는 범죄자 감독들이 지금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도리어 집도 땅도 팔아 그 많은 선수들에게 밥을 먹였습니다.

직접 찌개를 끓이고 쇠고기 샤브샤브 요리를 했습니다.

급성 간염으로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운동장에 나갔습니다.


어느 날 김성근 감독은 타격 지도 중 한 선수의 배트에 입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타격 지도에 너무 몰입하다 알루미늄 배트 타격 사정권에 들어간 것입니다.

앞니가 다 빠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선수들이 놀라 하얗게 질렸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고통스럽게 입을 틀어쥐고 피를 흘리며 “땅에 떨어진 이나 찾아봐라”라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이 떨어진 이 조각들을 찾아왔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이가 3개 다 썩었네. 벌레가 먹어서 하나도 쓸게 없네.”라고 농담을 하며 이 조각들을 던져버렸습니다.

“정말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 입술까지 다 터졌으니까. 그러나 내 잘못이지. 선수가 배트를 휘두르는데 그 옆에 있었으니. 그 선수나 다른 선수가 당황하는 걸 보니 내가 화를 내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농담을 했더니 하얗게 변했던 선수들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거야.”

(김성근 감독은 경상남도 사투리(부모님 고향 경상남도 진양군, 현 진주시)가 주축이 된 재일교포 발음에 나이와 작은 목소리, 발화구조 등이 결합되어 발음이 좋지 않습니다. 틀니를 끼게 한 충암고등학교에서의 사고도 김성근 감독의 불분명한 발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입술을 24바늘이나 꿰맸지만, 앞니를 잃었지만, 아이들, 제자들, 선수들은 살아났습니다.


다음 대회이자 1977년 마지막 전국대회였던 봉황대기 야구대회, 충암고등학교는 불운을 떨치기 위해 유니폼까지 바꾸고 출전했습니다.

충암고등학교는 운명이 걸린 봉황대기 8강전에서, 황금사지기 8강에서 만났던 신일고등학교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충암고등학교는 연장 10회말 끝내기 안타로 3대 2 드라마 같은 승리를 했습니다.

황금사자기 8강에서 끝내기 3점 홈런을 맞고 역전패한 후 포수 마스크도 벗지 못한 채 관중석까지 들릴 만큼 땅을 치며 울었던 조범현이 결승타를 쳤습니다.

충암고등학교는 결승에서 광주진흥고등학교를 5대 0으로 물리치고 정상에까지 올랐습니다.

“우리 우짜노. 대학 우찌 가노”하며 울었던 조범현은 대회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창설 9년 만의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습니다.

동시에 김성근 감독의 첫 우승이었습니다.


- 일간스포츠 신화섭, 임현동 기자의 “김성근 감독 “고교 감독 시절 집·땅 팔아 뭐했냐고?”” 참조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cateid=1028&newsid=20070422201214169&p=ilgansports

- 스포츠서울 이재국 기자의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참조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85835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4회초] 참기 힘들수록 냉정하게”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35487

- 프레시안 이종성 기자의 “포기를 몰랐던 스승 김성근, 인내로 화답한 제자 조범현” 참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091026141922

- 마이데일리 박세운 기자의 “'눈물에서 감동으로' 스승 뛰어넘은 제자 조범현” 참조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10251246212220&ext=na




2. 박철순과 김성근 감독(1982년~1983년 OB베어스 코치, 1984년~1988년 OB베어스 감독)


“그분은 프로생활뿐 아니라 내 선수생활 통털어 만난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생님이시다.”

“그는 연습장을 빠져 나갔다. 한참을 가더니 은행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거였다. 그는 내게 2000만원이라는 거금을 자신이 보증인이 되어 빌려 주었고, 또 그에 맞먹는 돈을 개인적으로 빌려 주었다. 나는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중략) 김성근 감독은 내가 엄청난 빚더미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얘기를 듣고는 자신이 한 부대의 수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심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아는 분이 있는 은행으로 곧바로 온 것이다.”


- 1995년 박철순의 자서전 ‘혼을 던지는 남자’(도서출판 형상) 중

(네이버 OB사랑 카페 태클베리님의 “베어스 2대 감독 김성근” 글 등에서 재인용)

http://cafeblog.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hty&where=article&query=%22%BA%A3%BE%EE%BD%BA+2%B4%EB+%B0%A8%B5%B6+%B1%E8%BC%BA%B1%D9%22&x=28&y=9

http://cafe.naver.com/oblov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2


(박철순은 1979년 6월 제2회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의 활약으로, 한국 선수 최초로 마이너리그에 진출했습니다. 박철순은 1982년 OB베어스에 입단해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도 등장하는 22연승을 기록합니다. 1982년 4월 10일 해태 타이거즈 전부터 9월 22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 김용철에게 결승타를 맞을 때까지, 박철순은 5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22번 연속 이겼습니다. 박철순의 22연승은 프로 원년인 1982년부터 28년 넘게 깨어지지 않은 불멸의 대기록입니다. 박철순의 단일시즌 22연승은 세계 프로야구에도 유래가 없는 기록입니다. 박철순은 1982년(OB베어스 김영덕 감독) 24승(다승왕)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방어율왕) 승률 0.857(승률왕) 108탈삼진(탈삼진 2위) 15세이브포인트(구원2위) 224 2/3이닝(이닝 2위) 15완투(완투 1위)의 기록으로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 MVP를 차지했습니다(MVP 단독후보).

그러나 허리 부상 3번, 아킬레스건 부상 2번 등 큰 부상만 5번이나 될 정도로 제대로 마운드에 설 수 없는 시련, 불운이 찾아왔습니다. 이혼, 엄청난 빚더미, 집단이탈항명사건(OB베어스 윤동균 감독 - 박철순, 김상진, 김상호, 장호연, 권명철, 김형석, 안경현, 임형석, 김종석, 이종민 등 주전 선수 17명), 팬들도 ‘포기’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박철순은 힘겨운 수술, 재활을 반복했습니다. 1985년 8월 20일 박철순은 청보 핀토스와의 대전 경기에서 무려 1062일 만에 첫 승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 14경기 만에 10승을 기록했던 박철순은 1996년 40살로 은퇴할 때까지 14년간 단 한 번도 10승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1982년 팀 80경기에서 24승을 기록했던 박철순이 1983년부터 10년 동안 기록한 승수는 27승이었습니다(김성근 감독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OB베어스 감독을 맡았고 김성근 감독이 OB베어스를 지휘한 5년 동안 박철순이 기록한 승수는 불과 8승이었습니다.). 1982년 팀 80경기에서 15완투를 기록한 박철순은 1996년 40살로 은퇴할 때까지 14번의 완투만을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박철순은 최고령 승리(1996년 9월 4일-40세 5개월 22일), 최고령 출장(1996년 9월 4일-40세 5개월 22일), 최고령 완봉승(1994년 8월 15일-38세 5개월), 최고령 세이브(1996년 7월 30일-40세 4개월 18일) 등으로 혼을 던졌습니다. OB베어스 팬들은, 두산 베어스 팬들은 그런 박철순을 불사조라고 부릅니다. 1997년 4월 29일 박철순의 은퇴식 때 울려 퍼진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My Way)’ 노래 가사처럼 박철순은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이 함께하는 삶을 온 몸으로 살았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던졌습니다. ‘불사조’ 박철순의 등번호 21번은 2002년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3. 최창호와 김성근 감독(1989년~1990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2001년~2002년 LG트윈스 감독)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은 바로 김성근 감독님이다.”

“김성근 감독님만큼 참다운 감독님도 드물다. 너무나도 야구에 열정적이셔서, 가끔은 정말로 야구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드는 분이다.”

“김성근 감독님은 내 야구인생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 2006년 스포츠서울 이종길 기자의 “[그 때 그 선수] '작은 거인' 최창호와의 인터뷰” 중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73&aid=0000039842


(최창호는 1987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보 핀토스에 입단했습니다. 하지만 최창호는 1987년(16 2/3이닝 0승 1패 방어율 7.56), 1988년(6 2/3이닝 방어율 8.10) 2시즌을 합쳐도 25이닝도 안 되는 투구이닝과 7점대를 넘는 방어율을 기록했습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꼴찌, 3위(1983년 장명부 30승 6세이브, 427 1/3이닝), 꼴찌, 꼴찌, 6위, 꼴찌, 꼴찌’로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던 최창호의 소속팀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에 어울리는 성적이었습니다.

(LG암흑기, 롯데 암흑기에 도전?

http://blog.paran.com/law/35354860)

1988년 시즌 후 태평양 돌핀스에 부임한 김성근 감독은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어울리는 구단의 지원 하나 없는 오대산 지옥훈련을 지휘합니다. 꼴찌 팀에서 패배의 관성에 젖었던 선수들은 자신감과 근성을 얻었습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는 62승 4무 54패 승률 0.533의 3위로 1982년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습니다. 1989년 최창호는 방어율 2.22(3위) 191탈삼진(2위) 10승(11위) 14패 2세이브의 에이스 투수가 되었습니다. 방어율 2.15(2위) 19승(2위) 10패 2세이브 116탈삼진(5위)의 신인왕 박정현, 방어율 2.45(4위) 11승(9위) 4패 6세이브의 정명원과 더불어 프로야구 사상 가장 뛰어난 (중고)신인 투수 3인방이 1989년 김성근 감독의 태평양 돌핀스에 탄생했습니다.1989년 태평양 돌핀스의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신인 3인방은 방어율 2위, 3위, 4위를 차지했습니다(1989년 방어율 1위는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이었습니다.). 최창호는 승운이 따르지 않은 탓에 방어율, 탈삼진에 비해 승패 기록은 좋지 못했지만 1987년(16 2/3이닝 0승 1패 방어율 7.56), 1988년(6 2/3이닝 방어율 8.10)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혁명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최창호는 1990년(태평양 돌핀스) 방어율 3.20(11위) 9승(18위) 9패, 1991년(태평양 돌핀스) 방어율 2.93(9위) 15승(5위) 11패, 1994년(태평양 돌핀스) 방어율 4.09(21위) 12승(11위) 11패, 1996년(현대 유니콘스) 방어율 3.85(19위) 8승(20위) 9패 등 16년 간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LG트윈스 등에서 방어율 3.54, 77승(통산 33위) 94패(통산 12위) 8홀드 15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4. 임호균 각서 파동과 김성근 감독(1989년~1990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임호균을 안 쓰면 간단했지. 사실 그가 없으면 안 될 정도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게 면피는 될지언정 나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도리는 아니었지. 임호균은 인천 야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였어. 야구 선배로서 쓸쓸한 말년을 맞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지. 지금은 작고하신 신동관 사장께 무작정 쳐들어갔지.”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서는 김성근 감독의 첫 시즌이었던 1989년, 임호균은 김성근 감독에게 단 1승도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 시즌 후 태평양 돌핀스 김성근 감독은 ‘임호균이 90년 시즌에 5승을 올리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쓰며 임호균의 방출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시즌 중 태평양 돌핀스 프런트 직원은, 신동관 태평양 돌핀스 사장에게 ‘감독이 각서를 지키기 위해 점수차가 크게 나 이기고 있는 경기에 임호균을 중간계투로 투입해 거저 승리를 주려 한다.’는 악의에 찬 왜곡 보고(해당 경기를 포함해 1990년 임호균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를 했습니다.

태평양 돌핀스 구단은 임호균의 ‘5승’을 ‘선발승 5승’으로 수정한데 이어, 코치들에게 임호균을 등판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예 임호균을 쓰지 않았지. 당연히 5승은 안 됐고. 그래도 후회는 없었어. 구단에선 나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빛이 변한 걸 알았거든.”


1989년 꼴찌가 익숙하던 인천 야구 최초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어 낸 김성근 감독은, 공항에서 ‘김성근 감독 경질’이 적힌 신문을 보게 됩니다.

김성근 감독은 1990년 임호균 각서 파동으로 태평양 돌핀스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 동아일보 장환수 기자의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김성근 前 LG트윈스 감독<上><中>”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018794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0188344


(임호균은 인천고등학교, 동아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77년(동아대학교 시절) 임호균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를 우승시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95번째 백마훈장을 받았습니다. 1980년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임호균은 실업팀 한국전력에 입단했습니다. 임호균은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시에도 방어율 0으로 최우수평균자책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야구의 스타이자, 인천야구의 상징이었습니다. 선동열 감독이 선수 시절, 최동원과 더불어 임호균을 우상으로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임호균은 1983년 인천 연고팀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해 방어율 3.03(13위) 12승(6위) 15패 2세이브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1983년 11월 17일 삼미 슈퍼스타즈 임호균은 롯데 자이언츠 우경하, 박정후, 권두조, 김정수와 4대 1 트레이드 되고 말았습니다. TV 스포츠뉴스를 보고 트레이드 사실을 접한 임호균은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에게 찾아가 항의하며, “어떤 선수가 삼미를 더 사랑하고, 삼미를 위해 헌신적일 수 있는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라도 꼭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어느 누가 더 심미 유니폼을 간절히 원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머지않아 회장님께선 똑바로 아시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된 임호균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상대로 7경기 3승(3경기 연속 완투승) 1패 방어율 2.07을 기록했습니다. 임호균은 1983년 시즌 후 동료이자 경쟁자인 임호균을 트레이드시키도록 한 장명부(1983년 30승 16패 6세이브, 427 1/3이닝, 방어율 2.34)와 10회 완투 대결을 펼쳐 4대 2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임호균은 1984년 10승(11위) 9패 방어율 2.95(11위)로 최동원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의 첫 번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임호균은 1985년에도 10승(10위) 10패 방어율 3.23(15위)로 롯데 자이언츠의 첫 번째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임호균은 1986년 10월 13일 TV에서 자신이 고향팀인 청보 핀토스(삼미 슈퍼스타즈 인수)로 트레이드되었다는 뉴스를 접합니다. 롯데 자이언츠 임호균, 양상문, 배경환, 김진근, 이진우 대 청보 핀토스 정구선, 정성만, 우경하의 5대 3 트레이드가 단행된 것입니다.

1987년 임호균은 고향팀 청보핀토스에서 9승(12위) 10패 방어율 3.78(21위)로 부활했습니다. 특히 임호균은 1987년 8월 2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인천경기에서, 1986년, 1987년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의 강타선(백인호, 송일섭,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한대화, 이순철, 장채근, 서정환)을 상대로 73구 완봉승(5대 0 완봉승)을 기록했습니다. 임호균의 73구 경기 최소 투구 완봉승 기록(9이닝)은 22년 넘게 깨지지 않은 대기록입니다(5이닝 완봉승으로는 2006년 7월 6일기아 타이거즈와의 잠실 경기에서 두산 베어스 랜들이 61구 완봉승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임호균은 1989년 시즌 후 방출과 은퇴의 위기에서 김성근 감독이 각서를 써서 방출을 면했으나, 1990년 김성근 감독이 임호균 각서파동으로 물러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 스포츠 춘추 박동희 기자의 “인천프로야구 최초의 토종 에이스 73구로 해태를 완봉한 사나이 삼미 투수 임호균” 참조

http://news.naver.com/sports/new/expertContents/read.nhn?category=baseball&expert_name=pdh&page=1&id=220




5. 임창용과 김성근 감독(1995년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2000년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임창용은 1995년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해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습니다.

1995년 고졸신인 임창용은 14경기 29 1/3이닝 0승 2패 방어율 5.83으로 부진했습니다.

임창용은 지각은 물론이고 훈련을 빼먹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사이드암으로 150km 가까운 직구를 던지는 잠재력을 가진 임창용은 이전까지 경험했듯이 어느 감독, 코치도 자신을 심하게 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임창용은 이 때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을 처음 만났습니다.

임창용이 3일간 무단이탈했다가 돌아온 날, 김성근 감독은 “너 뭐하는 놈이야. 필요 없으니 당장 나가.”라며 소리쳤습니다.

깜짝 놀란 임창용은, 훈련이 끝난 뒤 김성근 감독의 숙소를 찾아갔습니다.

방 앞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김성근 감독은 문을 열지도 않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임창용을 방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임창용과 마주 앉자 임창용이 얼마나 좋은 투수인지, 열심히 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자상하게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임창용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임창용(182cm)은 김성근 감독의 지시에 따라 65kg이었던 몸무게를 10kg 넘게 늘렸고, 혹독한 훈련 끝에 트레이드 마크인 강속구를 제대로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임창용은 1996년 49경기 114 2/3이닝 7승 7패 방어율 3.22, 1997년 64경기 135이닝 14승 8패 26세이브 방어율 2.33, 1998년 59경기 133 2/3이닝 8승 7패 34세이브 방어율 1.89 등으로 특급선수로 성장했습니다.

1998년 12월 14일 삼성 라이온즈가, “내 몸엔 파란피가 흐른다.”고 말하는 양준혁에 황두성, 곽채진, 현금 10억원을 더해, 해태 타이거즈 임창용 1명과 트레이드(‘현금+3명’ 대 1명의 트레이드)했을 정도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그때 임창용이 오래 안 기다리고 가 버리면 어떡하나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며 회상했습니다.

임창용은 200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2군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과 재회하는 등 계속 인연을 이어왔습니다(다만 김성근 감독이 1군 감독으로 있는 팀에서 뛴 적은 없어 적으로 상대한 기간이 훨씬 깁니다.).


임창용은 2009년 제2회 WBC 결승전에서 결승타를 맞고 전범 취급을 받았습니다.

임창용은 귀국 당시 인천국제공항에서 홀로 따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임창용은 “공항 인터뷰룸에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해 허둥지둥하는데 그 누구도 말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임창용은 “내가 참석해봐야 후배들 입장만 곤란해질 것 같다.”라고 말하고 다음 날인 3월 26일 WBC 대표팀 청와대 만참에 홀로 불참해야 했습니다.


김응룡 삼성 라이온즈 사장은 “임창용이 이치로한테 던진 공은 일부러 정면 승부한 게 맞아.”, “김인식 감독하고 코칭스태프가 (임)창용의 성질을 몰라서 그래. 한국에 있을 때도 몇 차례나 그랬는 지 모른다. 거르라고 사인을 내면 일부러 가운데로 던져 얻어맞거나, 화들짝 놀라게 한 게 여러 번”, “그때 벤치에서 사인만 낼 게 아니라 선수, 관중, 기자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그라운드에 나가 공개적인 지시를 했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임창용은 1996년 49경기 114 2/3이닝 방어율 3.22, 1997년 64경기 135이닝 방어율 2.33, 1998년 59경기 133 2/3이닝 방어율 1.89, 2001년 184 2/3이닝 방어율 3.90, 2002년 204 1/3이닝 방어율 3.03 등 김응룡 전 삼성 라이온즈(해태 타이거즈) 감독에게 8년간 75승 43패 102세이브를 안겼습니다.)

- 스포츠월드 이준성 기자의 “김응룡 사장 "임창용 고의 정면승부 맞아"” 참조

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ports/BaseBall/Article.asp?aid=20090326005144&subctg1=25&subctg2=00


선동열 삼성 라이온즈 감독도 “그 상황에서 왜 스트라이크를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1루가 빈 상황에서 우타자 나카지마와 상대했어야 한다. 그 부분은 100% 아니 120% 임창용의 잘못이다.”, “임창용이 지난해 1군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거뒀지만 5패를 기록한 부분은 그만큼 실투가 많다는 뜻”, “아무래도 욕심을 부려 그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199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임창용은 해태 타이거즈 선수 선동열을 만났고, 삼성 라이온즈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코치, 감독 선동열을 만났습니다. 임창용은 2007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의 동의(2005년 FA 계약을 맺을 당시 계약서에 ‘해외 진출을 원할 경우 조건 없이 풀어준다’는 조항을 넣음)를 얻어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습니다. 즉 임창용은 FA자격을 얻어 해외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임의탈퇴 공시 후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의 동의를 받아 해외에 진출했습니다. 따라서 FA신분이 아닌 임창용은 한국 프로야구로 복귀할 경우 원소속팀인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와야 합니다. 선동열 감독은 2009년 말 5년 27억 재계약을 했습니다.)

- OSEN 손찬익 기자의 “선동렬, "이치로와 승부 이해할 수 없었다"” 참조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03260162


MBC 100분 토론은, 강승규 대한야구협회장, 허구연 MBC 해설위원, 김성한 WBC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김종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연예인야구팀 배칠수를 패널로 내세워 WBC 결승전에서 임창용이 결승타를 맞은 것을 토론(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김성한 대표팀 수석코치는 MBC 100분 토론에서 “감독님이 분명히 정면승부를 하지 말라는 사인을 냈고, 코치도 포수를 통해 투수에게 사인을 전달했다.”, “유인구로 어렵게 승부한 뒤 이치로가 속지 않으면 볼넷으로 거르라고 했다.”, “웬일인지 임창용이 볼카운트 2-2에서 한 가운데 밋밋한 변화구를 던졌다.”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MBC 100분 토론에서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급조된 대표팀에선 종종 사인미스가 일어나곤 한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 일본야구에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하는지 보라.”, “(임창용의 승부는) 일본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 매일경제 김지형 기자의 “생뚱맞은 `100분토론`…웬 임창용 실투?” 참조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190649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경기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임창용은 분명 대표팀 마무리답게 잘 던져줬다. 그 한 장면 때문에 임창용을 비난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지나간 일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임창용 없는 대표팀을 그려보라.”, “임창용은 대회 직전 시범경기서 팔꿈치를 타구에 맞았다. 선수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대표팀에 달려와줬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고마운 선수”, “임창용은 소속팀에서 계속 1이닝만 던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2이닝을 던져 스스로에게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야구인으로서 오히려 고맙게 느끼고 있다.”, “임창용이 없었다면 한국이 지금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임창용이 귀국 기자회견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봤다. 임창용에게 '고개 숙이지 말라, 야구인들 중에는 임창용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전해 달라.”, “다 잊고 소속팀으로 돌아가서 잘 던져주길 바란다.”고 애틋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 OSEN 강필주 기자의 “김성근, "(임)창용아, 고개 숙이지 마라"” 참조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03270046


(김재박 감독의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참패 후에도 김성근 감독은 “김재박 감독은 불행히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누가 했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그런 팀을 두개 이상 만들 수 있는 기반을 하루 빨리 마련해야만 진정한 야구 강국이 될 수 있다.”, “더 큰 틀에서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려 해야지 지엽적인 문제만 건드려선 아무 도움이 안 된다.”라며 김재박 마녀 사냥 분위기 속에서도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 조이뉴스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김재박 감독은 불행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참조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236769


반대로 김성근 감독은, 원칙론을 주장하며 유영구 KBO 총재의 (과거 KBO 사무총장 임기 중 광고업체로부터 8900만원을 받아, 잠실야구장 펜스광고물 설치 수의계약 대가(배임수재) 여부가 문제되었던) 이상국 KBO 사무총장 지명, 심판위원회의 KBO 총재 직속 기구화, 시즌 중 월요일 경기 폐지, 정수근 징계 해제 결정 등을 비판한 거의 유일한 야구인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이상국 KBO 사무총장 비판에 대해

http://blog.paran.com/law/32054939

2009년 한국시리즈 SK, 기아의 사인훔치기, 수신호, 오심, 욕설 논란

http://blog.paran.com/law/34598443)


2009년 초 임창용은 “생각해 보면 96년 몸이 가장 좋았다. 투구할 때 몸이 잠깐 '이륙'했다가 '착지'하 는 느낌이 들었다”, “김성근 감독의 지도를 다시 받고 싶은데 너무 힘들어서…”라고 말했습니다.

임창용은 2010년 시즌 후 야쿠르트 스왈로즈 스왈로즈와의 3년 계약이 끝납니다.

CF출연 제의도 거절한 임창용(야쿠르트 스왈로즈)은, 2010년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와이번스 스프링캠프에 합류했습니다.

두산 베어스 소속으로 2007년, 2008년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을 펼쳤고 특히 빈볼시비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이혜천도 임창용과 함께 (전 소속팀이 아닌) SK와이번스 스프링캠프에 합류했습니다.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4회말] 말괄량이 길들이기①”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35816

- 중앙일보 김식 기자의 “임창용-이혜천, 김성근 감독 지도 받는다” 참조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271118

- 스포츠조선 김남형 기자의 “출국한 임창용의 마이웨이, '실력으로 돈 벌고 싶다'” 참조

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sports/201001/20100112/a1l74138.htm

- 스포츠조선 김남형 기자의 “[테마기획] 임창용과 WBC 연장 10회, 재조명된다” 참조

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sports/200911/20091130/9b006004.htm




6. 이진영과 김성근 감독(1996년~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2007년~ SK와이번스 감독)


1989년 한겨울 오대산 지옥훈련으로 꼴찌 태평양 돌핀스의 창단 8년 만의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은, ‘(8위), 7위, 8위, 7위, 8위, 8위’의 꼴찌팀 쌍방울 레이더스를 진정한 돌격대로 바꾸었습니다.

(LG암흑기, 롯데 암흑기에 도전?

http://blog.paran.com/law/35354860)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1위 해태 타이거즈에 불과 3승(3경기)이 뒤지는 2위를,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1위 해태 타이거즈에 불과 3.5경기 뒤지는 3위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① 1996년, 김성근 감독, 정규시즌 2위, 승률 0.563, 플레이오프 현대 유니콘스 상대로 2승 3패, 최종순위 3위

② 1997년, 김성근 감독, 정규시즌 3위, 승률 0.571, 준플레이오프 삼성 라이온즈 상대로 1승 2패, 최종순위 3위

가난하지만 강했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외인구단’,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불렸습니다.

(삼성 황금기, 해태 황금기 등 황금기 팀순위

http://blog.paran.com/law/35384705)


하지만 재정난을 겪던 모기업의 1997년 부도는 벼랑 끝에서 돌격대 정신을 발휘하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아예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들이 여관, 분식점, 공원을 전전했고, 숙박비 절약을 위해 대전, 광주 경기는 당일치기로 하기도 하고, 외국인 선수 없이 시즌을 치르기도 하고,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조규제,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등 투타 핵심 선수들, 마일영, 라형진 등 선수지명권까지 사실상 현금 트레이드를 하기도 했습니다.

선수들 숙식비용을 위해 김성근 감독이 사비를 털 정도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 쌍방울 레이더스의 서울 원정 숙소로 조직 폭력배들이 들이닥친 일이 있습니다. 폭력조직 보스의 애인과 몰래 연애를 하고 있던 모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조직 폭력배들은 “A선수를 당장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며 협박했습니다. 한 밤의 조폭 난동 사건은 김성근 감독이 직접 나선 뒤에야 겨우 진정되었습니다. A선수는 끝까지 숨겨 놓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그땐 정말 무섭더라.”고 회상할 정도였지만, 김성근 감독은 한밤의 조폭 난동 사건을 유발시킨 A선수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때 기분만으로 선수를 몰아붙이면 선수 생명은 물론 인생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운 팀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 잠도 못자고 새벽까지 전력분석을 하던 김성근 감독이 신장암에 걸려 오른쪽 콩팥 제거 수술을 받은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담석이라고 둘러대고 바로 야구장으로 돌아왔고, 하루에 1000개씩 펑고를 쳤습니다.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신인지명을 받은 선수는 13명이었지만, 감독, 선수의 연봉, 운영비도 없는 쌍방울 레이더스에게 신인선수 몫의 계약금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계약할 돈도 없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을 받은 선수는 대학을 택하거나 야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1999년 1차지명 선수는 지금의 국민우익수 이진영이었습니다.

이진영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야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팀이 여러 명의 신인선수를 영입하는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 등이 1억의 계약금을 갹출해 간신히 입단시킨,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유니폼을 입은 유일한 신인 선수가 이진영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아니었다면, 1999년 고졸신인 이진영, 2006년 WBC 도쿄대첩의 영웅이자 국민우익수 이진영, 통산 타율 3할의 우익수 이진영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2006년말 이진영은 SK와이번스에 부임한 김성근 감독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진영은 2007년 자신의 첫 번째 정규시즌 우승,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2008년 자신의 두 번째 정규시즌 우승,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김성근 감독과 함께 했습니다.


2007년, 2008년 이진영이 김성근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 때문에 100경기도 뛰지 못했고, 규정타석도 채우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진영은, 시범경기 도루 도중 오른쪽 새끼손가락 부상을 당해 시즌 개막 후 20여일간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4월 18일 첫 출장 후 단 3경기만을 뛰고 옆구리 부상으로 다시 약 한 달간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또 2007년 8월 18일 이진영은 기아 타이거즈 투수 이범석의 사구(이진영은 만루홈런 등에 대한 빈볼이라고 주장)를 맞아 시즌아웃 판정도 받았습니다.

시즌중 큰 부상을 3번이나 당해 20일 내지 30일 이상 결장하는 일이 3번이나 있었던 이진영(126경기 중 80경기 출장)이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것을 플래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인정된다면, 군입대한 선수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것을, 감독의 코드인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2008년의 경우도 이진영은 9월 7일 LG트윈스 전에서 송구를 받다가 부상을 입어 시즌아웃 되었습니다.

2008년 9월 7일까지 팀 103경기 중 95경기에 출장해 363타석(103경기 규정타석은 319타석임)을 기록한 이진영은 이후 정규시즌에 뛰지 못했습니다(126경기 규정타석은 391타석임).


이진영은 2009년 LG트윈스에서도 허벅지 등의 부상들로 몸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2군에 내려가 휴식을 취해야 좋지만, 김재박 감독의 3년 계약기간 마지막 시즌 7위를 기록한 팀 사정상 아픈 몸을 이끌고 대타, 지명타자로 출장한 경기들이 많았습니다.

이진영은 133경기로 늘어난 2009년(2008년까지는 126경기) 120경기에 출장해 425타석을 기록했습니다(133경기 규정타석은 412타석임).


이진영이 1루 수비 부담 때문에 LG트윈스와 FA계약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2008년 이진영이 1루 수비를 자주 본 것은, SK와이번스 1루수 요원인 이호준, 박정권이 각각 시즌아웃되어 1루 수비를 볼 주전선수가 전무해진 매우 이례적이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2007년 이진영은 1경기 단 1이닝만 1루 수비를 보았습니다.).

(이진영은 2008년 한국시리즈 5차전 마지막 경기, 2대 0으로 앞선 9회말 마지막 수비, 1아웃 만루 상황에서 두산 베어스 김현수의 투수->포수->1루수로 이어지는 SK와이번스의 우승을 확정짓는 병살타의 마지막 공을 잡은 1루수로 프로야구사, 프로야구 영상에 영원히 남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따라서 이호준(우타자)과 박정권(좌타자)이 모두 복귀한 2009년 이진영이 SK와이번스에서 1루수를 볼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2010년 LG트윈스는 이진영 외에도 박용택, 이택근, 이병규, 이대형, 안치용 등의 최고 선수들이 외야수 주전 경쟁을 벌입니다.)


이진영은, 1루수 김태균, 이대호가 있는 WBC대표팀에서도, 1루수 페타지니, 최동수가 있는 LG트윈스에서도 1루수로도 경기에 출장했습니다.

우익수만 하는 이진영에서 우익수, 1루수가 가능한 이진영으로 가치가 높아진 것입니다.


“대표팀에 합류하고 나니 류중일 코치님이 "1루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기분이 어땠냐고? 괜히 뿌듯했다. 내가 팀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아서였다. 내가 1루 수비를 아주 잘하는 건 아니지만 팀이 필요로 할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중략)

1루수 미트를 보면 김성근 감독님 생각이 많이 난다. 처음 1루 훈련을 하라고 하셨을 땐 솔직히 서운하기도 했다. 내 자리가 있는데 다른 포지션을 해야 한다는 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1루쪽으로 공 오는 것도 무섭고.

하지만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었다. 적응이 되면서 매력도 느끼게 됐고 팀에도 보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님 덕분에 좀 더 쓸모 있는 선수가 된 것 같아 기분 좋다. 1루 수비를 배워둔 덕에 작년에 우승하는데 도움이 됐으니 대표팀서도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이진영의 WBC 일기②]1루수 미트를 챙기며” 중 일부

http://spn.edaily.co.kr/sports/newsRead.asp?sub_cd=EB21&newsid=01190646589620040&DirCode=0020201


이진영은 FA계약 이후 1루 수비 등 포지션 때문에 팀을 옮긴 것은 아니라고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이진영이 FA계약으로 LG트윈스로 이적한 것은, LG트윈스 측에서 FA계약 총액과 계약금 등 보장금액 면에서 훨씬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정성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진영의 FA계약은 최소 4년 40억 이상(보장금액 40억 이상이라는 기사도 있음)으로 분석됩니다.


SK와이번스와의 우선협상기간이 끝난 자정 무렵 이진영은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남을 수 있으면 남아라. 하지만 어디 갈 곳이 있느냐”라고 말했고,

이진영은 “LG에 갈 것 같습니다. (SK와 LG의)금액 차이가 많이 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1, 2억 원 차이가 나면 잡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1999년 김성근 감독은 1억원을 갹출해 고졸신인 이진영을 프로에 데뷔시켰습니다.

10년 뒤인 2008년 말 이진영은 4년 40억 이상을 받는 특급선수로 성장해 김성근 감독의 곁을 떠났습니다.


- 경향신문 노우래 기자의 “1000승 김성근감독 암도 두손 든승부사 인생” 참조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809042244066&sec_id=510201&pt=nv

- 스포츠서울 윤승옥 기자의 “김성근 감독 "신장 한쪽과 1000승 맞바꿨다"” 참조

http://www.sportsseoul.com/news2/baseball/pro/2008/0904/20080904101010100000000_5966394435.html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박동희 in 캠프] 김성근 감독과의 대화”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209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4회초] 참기 힘들수록 냉정하게”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35487

- 오마이뉴스 이준혁 기자의 “삼삼하고 팔팔한 '야신', 김성근의 야구인생은 계속된다”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73934




7. 심성보와 김성근 감독(1996년~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2001년~2002년 LG트윈스 감독)


심성보는 천안북일고등학교, 단국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심성보는 1995년 2차지명 1순위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습니다.

그러나 1995년 대졸신인 심성보는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하고 타율 0.234, 7홈런, 31타점에 그쳤습니다.

(8위), 7위, 8위, 7위, 8위, 8위의 쌍방울 레이더스는 프로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열악한 환경, 침체된 분위기의 팀이었습니다.


1995년 시즌 후 쌍방울 레이더스 심성보는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을 만나게 됩니다.

대학시절(단국대) 갖가지 꾀병으로 한 번도 동계훈련을 받지 않았고, 프로 입단 뒤에도 대충 훈련했던 심성보 앞에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상상도 못할 훈련이 계속됐다. 타자들은 손바닥이 찢어져 스윙할 수 없는데도 감독님 앞에서 다시 수천 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내야뿐만 아니라 외야 펑고도 하루 1천 개 이상씩 받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휴식일에도 어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무리하게 놀아도 다음날 몸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감독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그런데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꾸준히 하다보면 그렇게 안 되는 것도 결국엔 잘 되기 마련이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SK 선수들이 ‘KIA에 져서 분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운동한 게 아깝고 억울해서 분했다’고 말한 걸 들었다. 1996시즌 쌍방울이 꼭 그랬다. 우리는 4강에 오르리란 예상도 못 했지만, 떨어지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0대 10, 0대 5로 지고 있어도 언제든 따라갈 수 있다는 집념으로 경기마다 온 힘을 다했다. 설령 지면 그동안이 악물고 운동한 게 억울하고 아까워서 잠이 오질 않았다.”


1995년까지 ‘(8위), 7위, 8위, 7위, 8위, 8위’의 꼴찌팀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96년부터 진정한 돌격대,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변신했습니다.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1위 해태 타이거즈에 불과 3승(3경기)이 뒤지는 2위를,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1위 해태 타이거즈에 불과 3.5경기 뒤지는 3위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심성보도 1996년 타율 0.275, 5홈런, 51타점, 1997년 타율 0.269, 15홈런, 73타점, 1998년 타율 0.269, 24홈런, 86타점 등 ‘포스트 김기태’라는 평가를 받는 중심타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재정난을 겪던 모기업의 1997년 부도는 벼랑 끝에서 돌격대 정신을 발휘하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아예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팀의 중심타자 김기태를 현금 트레이드 할 때(쌍방울 레이더스는 외국인 선수 없이 시즌을 치르기도 하고,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조규제,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등 투타 핵심 선수들, 마일영, 라형진 등 선수지명권까지 사실상 현금 트레이드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신 역할을 해줄 것이라던 심성보는 당뇨병이 갑자기 심해졌습니다.

“하루에 살이 1kg씩 빠졌다.”는 심성보의 회상처럼 85kg이던 심성보의 몸무게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65kg이 되었습니다.

당뇨병으로 군면제 판정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그런 심성보에게 훈련 일정도 따로 짜주고 휴식 시간도 충분히 제공해주었지만, 놀기 좋아하는 ‘게으른 천재’ 심성보는 확실한 자기관리로 당뇨병을 이기기에는 너무 젊고 어리석었습니다.


“아버지같은 김성근감독님”

“정말 남달리 잘해주셨어요. 별달리 아부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감독님 계실 때 큰 사고만 네 번을 쳤거든요.”

“(2000년 SK에서 방출됐을 때) 감독님께 살려달라고 했어요. 운동하고 싶다고.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대뜸 LG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LG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어요. (임)수혁이형이 잘못된 지 얼마 안됐을 때였거든요. 심성보도 데려왔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부담이 컸어요. 감독님 얼굴에 똥칠할까봐”

(김성근 감독은 예전에도 지금도 선수들 사이에서 ‘지푸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성보, 가득염, 안경현, 박정환, 신윤호, 윤재국 등 많은 방출선수들이 지푸라기를 잡고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습니다.)


2000년 4월 18일 잠실 경기에서 임수혁이 쓰러졌고, LG트윈스 구단은 법정소송 끝에 3억여원을 지급했습니다.

고관절무혈괴사증으로 선수생명이 위태로웠던 프랜차이즈 스타 김재현에게 구단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할 만큼, LG트윈스 구단은 사고,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픈 선수에 대해 민감했습니다.

LG트윈스 2군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은 구단의 거센 반대를 온몸으로 막고 군면제가 될 정도로 당뇨가 심한 방출 선수 심성보를 LG트윈스로 데려왔습니다.

평발에 당뇨를 앓는 방출 선수 심성보는 LG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첫해인 2001년 247타석 0.279의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10월 30일 LG트윈스(1승 2패)와 기아 타이거즈(2승 1패)의 5전 3선승제 플레이오프 4차전, 0대 1로 뒤진 1회말 LG트윈스의 공격, 2사 만루 상황에서, 투수는 14승 5패 1홀드 13세이브의 특급 투수 리오스, 타자는 팬들이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외인부대원 심성보였습니다.

심성보의 타구는 중견수 앞을 굴렀고, 타격과 동시에 달리기 시작한 두 명의 주자가 홈을 밟았습니다.

2대 1 LG트윈스의 역전, 잠실구장은 “심성보”를 연호했습니다.

그리고 4회말, 1회말과 달리 “심성보”를 연호하는 관중들 앞에 등장한 선두타자 심성보는 기습번트로 출루했고, 후속 타자의 안타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플레이오프 패배 위기에 몰렸던 LG트윈스는 심성보의 3안타 2타점 1득점 활약으로 3대 2로 간신히 플레이오프 4차전 승리를 거두었고,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도 승리해 2002년 우승보다 빛난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 겨울 약한 전력의 LG트윈스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은 중도경질 되었고, 2003년 심성보는 3타석 2타수의 기회만을 얻고 LG트윈스에서 방출되었습니다.

2003년 LG트윈스에서의 3타석,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63타석이 심성보의 선수생활 마지막이었습니다.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쌍방울 위클리] ‘돌격대의 마지막 거포’, 심성보의 회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53

- 스포츠서울 최정식 기자의 “[인물포커스] 심성보 "지금도 프로경기 안봐, 가슴 아파서..."” 참조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56971

-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의 “당뇨를 이겨낸 '맘보투혼', 심성보”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5016




8. 2002년 김성근 LG트윈스 감독 경질(11월 23일)과, 회갑연(12월 12일)


2001년 시즌중 김성근 감독은 9승 25패 승률 0.265(팀타율이 아님)의 압도적인 8위 LG트윈스의 감독대행직을 맡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2001년, 2002년 모두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렸고, 특히 정식감독이 된 첫 해인 2002년 LG트윈스를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습니다(김성근 감독은 2009년까지 역대 LG트윈스 감독 7명(김성근 감독 승률 0.528, 이광환 감독 승률 0.526, 백인천 감독 승률 0.506, 천보성 감독 승률 0.500, 이광은 감독 승률 0.463, 이순철 감독 승률 0.431, 김재박 감독 승률 0.421) 중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했습니다.).


‘야구의 신’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지도력으로 약한 전력의 LG트윈스를 준우승으로 이끈 김성근 감독을 기다린 것은, 그러나 “당신야구는 김성근야구지, LG야구가 아냐.”라는 어윤태 LG트윈스 사장(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청장)의 중도경질 통보였습니다.

고관절무혈괴사증으로 선수생명이 위태롭던 대타 김재현이 2타점 2루타성 타구를 치고 절뚝거리며 1루에 갔던 2002년 LG트윈스의 마지막 경기 후, 보름도 지나지 않은 2002년 11월 23일의 일이었습니다.


이상훈 등 선수들이 반발하고, 강추위 속에서 많은 팬들이 버스까지 동원해 그룹 본사와 농구팀 경기장에서 “‘정도 경영’ 추구해온 LG 그룹, 야구단은 ‘독재 경영’, 어윤태 사장, 유성민 단장 당신들은 팬들의 참뜻을 아느냐!”, “우승을 못하면 짤리니 꼭 우승하라”는 플래카드를 거는 등 항의를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어윤태 LG트윈스 사장(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청장)은, 팬들의 거센 반발에도 2002년 7위에 그쳐 한화 이글스와 재계약을 하지 못한 고려대 2년 후배 이광환 감독을 LG트윈스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2003년 이광환 감독의 LG트윈스는 6위에 그쳤습니다. 2002년 이후 LG트윈스는 666-8587 전화번호 순위를 기록하며 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는 프로야구 역대 최장기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기록입니다. LG트윈스 어윤태 사장은 LG트윈스 홈페이지를 통해 “준우승한 감독을 경질하면서 야기된 팬들의 분노를 이해한다.”며 사죄표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LG암흑기, 롯데 암흑기에 도전?

http://blog.paran.com/law/35354860)


2002년 12월 12일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이 열렸습니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중도경질을 당한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은, 썰렁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득 찼습니다.

OB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트윈스의 거의 모든 전현직 선수들, 코치들 등 100명이 넘는 많은 야구인들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김성근 감독을 중도경질 했던 LG트윈스 프런트의 직원들(김연중 운영부장 등)도 있었습니다.

제자 대표로 축사를 읽은 SK와이번스 김기태(현 LG트윈스 2군 감독)가 “이 정도 인원이면 신생 구단 1, 2개는 너끈히 만들겠다.”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1964년 영구귀국(한일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으로 일본에 남은 가족, 친구 등과의 영원한 이별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을 하던 날 이후 생애 두 번째 눈물을 흘린 김성근 감독은, “오늘 여러분을 다시 보니 38년 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한 것은 생애 최고의 결정이었다는 자부심이 듭니다. 감독이기에 앞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여러분과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모자란 김성근을 믿고 따라준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과 함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 동아일보 장환수 기자의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김성근 前 LG트윈스 감독<上>”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0187945

- 동아일보 장환수 기자의 “김성근 감독 회갑 "영원한 우리의 감독"”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0167353

- 오마이뉴스 이정래 기자의 “김성근,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난다”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0102714




9. 이승엽과 김성근 감독(2005년~2006년 지바롯데 마린스 타격 코디네이터, 1·2군 순회코치)


2002년 11월 10일 한국시리즈 6차전, 2승 3패로 밀리던 김성근 감독의 LG트윈스는 9회말 1아웃까지 9대 6으로 앞서 있었습니다.

단 두 타자만 처리하면 3승 3패로 균형을 맞추고 분위기를 역전 시킬 수 있었습니다.

1아웃 1, 2루가 되었고 타석에는 한국시리즈 20타수 2안타의 상대 타자가 들어섰습니다.

한국시리즈 20타수 2안타의 홈런왕 이승엽이었습니다.

이승엽은 동점 3점 홈런을 쳤고, 뒤이어 나온 마해영은 우승확정 끝내기 역전 연속타자 홈런을 쳤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2002년 우승은 무려 17년만의(한국시리즈 우승으로는 처음이자 20년만의) 우승이었습니다.

(프로야구 구단별 우승간격

http://blog.paran.com/law/30453258)


반면 김성근 감독은 이승엽의 홈런으로 우승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도경질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간의 야인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승엽이 일본으로 가기 전인 2003년 말, 한 스포츠용품 회사 행사장에서 이승엽은 모 기자에게 “어휴, 김성근 감독님한테 배우면 하도 뛰어서 애들 무릎 다 나간대요.”라며 낄낄 거리며 농담을 했습니다.


2003년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은 56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홈런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고 일본 프로야구 지바롯데 마린스에 입단했습니다.

그러나 2004년 이승엽은 2군행을 경험하며 타율 0.240, 14홈런, 50타점에 그쳤습니다.


이승엽은 2005년 지바롯데 마린스에 코치로 온 김성근 감독을 만났고 김성근 감독과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승엽은 2005년 타율 0.260, 30홈런, 82타점(일본시리즈 타율 0.545 3홈런 4득점 6타점)의 기록을 냈고, 2006년에도 WBC에서의 맹활약을 시작으로 타율 0.323 41홈런 108타점의 기록을 냈습니다.


사실 김성근 감독은 2005년 6월 한국 프로야구 모 구단으로부터 감독직을 제안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자식으로 생각하는 이승엽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2년이 넘는 방랑 생활, 야인 생활 끝에 찾아온, 수억의 계약금과 연봉을 받을 수 있는, 환갑을 넘은 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감독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이 얘기는 지금 처음 밝히는 거다. 아마 승엽이도 모를 것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감독직 제의를 받았다. 심히 고민스러웠다. 마음은 정말 가고 싶었다. 일본에서의 더부살이 인생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승엽이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거다. 자식은 부모를 떠나도 부모는 자식 혼자 놓고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2003년 말 이승엽은 모 기자에게 “어휴, 김성근 감독님한테 배우면 하도 뛰어서 애들 무릎 다 나간대요”라며 낄낄거리며 농담을 했습니다.

2005년 이승엽은 홈페이지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줬지만 특히 김성근 감독에게 감사한다. 내가 존경하는 분으로 항상 많은 도움을 준다. 김 감독은 정말로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2007년 이승엽은 한 인터뷰에서 “만약 한국에서 뛰게 된다면 김성근 감독님의 팀에서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2008년 이승엽은 모 책에서 “힘들 땐 김성근 감독님이 내 마음을 헤아려주신다는 믿음이 내겐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2002년 LG트윈스에서 중도경질된 후 2년여간 무소속 야인 시절을 겪었습니다.

이 기간 김성근 감독은 보수도 받지 않고 지하철에서 3시간을 보내고 지방원정까지 다니며 자비로 학생 야구, 사회인 야구를 지도했습니다(김성근 감독은 1993년부터 LG트윈스에서 활동한 이상훈을 이상훈의 서울고 시절 40여일간 지도한 적이 있는 등 프로야구와 별개로 학생 야구, 사회인 야구 야구지도를 해왔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을 주도하기도 했던 김기태 요미우리 코치(현 LG트윈스 2군 감독) 등이 “감독님이 학교 가는 건 이제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 이제 한국 야구의 큰 어른으로 대접만 받아도 모자란데…”라며 안타까워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김성근 감독이 무소속 야인으로 학생 야구, 사회인 야구를 지도할 때, 박찬호, 이승엽, 김병현 등 최고의 선수들도 김성근 감독에게 야구를 전수받았습니다.

메이저리그와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오랜 감독 생활을 한 발렌타인 감독은, 유달리 직언을 많이 했던 김성근 감독과 헤어지며 “당신은 최고입니다.”라는 사인을 선물했습니다.

임창용(전 삼성 라이온즈), 이혜천(전 두산 베어스) 등은 (전 소속팀이 아닌)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는 SK와이번스 캠프에 합류했습니다.


- 일요신문 이영미 기자의 “이승엽 떠나보낸 지바 롯데 코치 김성근 인터뷰”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cateid=1028&newsid=20060127102616973&p=ilyo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6회초] '최고'들의 스승으로 사는 법”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36930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9회초] 잠들지 않는 야인(野人)”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39347




10. 마해영과 김성근 감독(2008년 올스타전 동군 감독)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1아웃, (이승엽의 동점 3점 홈런에 이어) 마해영은 우승확정 끝내기 역전 연속타자 홈런을 쳤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17년만의(한국시리즈 우승으로는 처음이자 20년만의) 우승이었습니다.

동시에 2002년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마해영의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습니다.

반면 김성근 감독은 마해영의 홈런으로 우승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도경질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간의 야인 생활, 4년간의 한국 프로야구 야인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008년 8월 3일 동군과 서군의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열렸습니다.

동군 감독은, 6년 전 LG트윈스를 준우승으로 이끌고 경질되었던, 2007년 SK와이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휘한 김성근 감독이었습니다.

동군 지명타자 올스타는 6년 전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2008년 87타석에서 타율 0.153를 기록한 롯데 자이언츠 마해영이었습니다.

마해영은 올스타전 출전 선수 중 유일한 2군 소속으로, 마지막 1군 경기 기록은 2008년 6월 20일 잠실구장 LG트윈스전에서 기록한 2타석 2타수 무안타 2삼진이었습니다.


올스타전 라인업이 발표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동군 4번타자는 마해영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마해영을 4번 타자로 기용한 것은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라.”라고 말했습니다.

타순이 발표되자 마해영은 “역시 김성근 감독님이 팬 서비스를 아신다니까.”, “4번을 칠 줄 알았다면 아내와 아들도 부를 걸 그랬다.”라고 말했습니다.


2008년 8월 3일 올스타전에서 4번 타자 마해영은 4타석 3타수 1안타(2루타) 3타점 1득점의 눈부신 활약으로 동군의 11대 4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마해영의 3타점은 올스타전 양 팀 최다 타점이었습니다.

동군 김성근 감독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해영을 교체하지 않았고,

문학구장 야구팬들은 마해영이 나올 때마다 “마해영”을 외쳤습니다.

마해영은 올스타전 선구회상도 수상했습니다.


올스타전 이후 마해영은 더 이상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은퇴했습니다.

2009년 8월 3일 문학구장 올스타전은 마해영의 프로야구 마지막 경기가 되었습니다.


마해영의 14년 프로야구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는 2008년 6월 20일 잠실구장 LG트윈스전이었습니다.

이날 마해영은 5회초 8번타자 박현승의 대타로 나서 2타석 2타수 무안타 2삼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마해영의 14년 프로야구 마지막 경기는 2008년 8월 3일 문학구장 올스타전이 되었습니다.

프로 통산 260홈런(8위) 1003타점(5위)의 강타자 마해영은, 14년 프로야구 인생 마지막 경기인 2008년 올스타전에 4번 타자로 나와 4타석 3타수 1안타(2루타) 3타점 1득점의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고 선구회상을 수상했습니다.


마해영은 “감독님 배려와 팬들 성원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 오래 남을 올스타전이 될 것 같다”, “김성근 감독님께서 배려를 해주셨으니까 4번으로도 한 번 서 볼 수 있다. 감독님께 정말 감사하다. 또 팬들께도 정말 감사할 뿐이다. 여기에 내가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역시 팬들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게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OSEN 강필주 기자의 “마해영, "감독님 배려와 팬들 성원에 감사"” 참조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808040053

- 동아일보 배영은 기자의 “마해영 ‘마지막 4번타자’ 특★쇼” 참조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8040247

- 스포츠서울 최승섭 기자의 “[올스타 한마디] 롯데 조성환 "태균이만 거르면 이겨" 外” 참조

http://www.sportsseoul.com/news2/baseball/pro/2008/0803/20080803101010100000000_5824331931.html




11. 가득염과 김성근 감독(2007년~ SK와이번스 감독)


가득염은 1992년 2차지명 6번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습니다.

가득염은 한 시즌 최다승이 8승(1994년, 162이닝)일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득염은 좌완 중간계투로 2006년까지 15년간 무려 639경기나 출장하는 기록을 세우며 조연으로 롯데 자이언츠를 지켰습니다.


2006년 시즌 후 가득염은 방출되었습니다.

한 시즌도 함께 한 인연은 없었지만, 가득염은 김성근 감독의 SK와이번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2007년 방출선수 가득염은 67경기 40 1/3이닝 방어율 4.02로 맹활약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을 만나 야구와 인생의 눈을 떴다.”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것을 배웠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지침이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적다 보니 어느새 노트 한권이 됐다.”

“한타자를 상대하든. 두타자와 승부하든 마운드에 서는 것 자체가 행복해졌고. 김성근 감독과 좀더 일찍 만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감독님의 첫 우승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혹 더 이상 야구를 하지 못한다해도 얻은 것이 너무 많다.”

“김성근 감독과 만남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처음엔 감독님께 야구 배우고 싶어서 SK를 택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야구선수로 보다는 한 인간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


- 스포츠서울 윤승옥 기자의 “가득염 "김성근 감독은 야구와 인생에 눈뜨게했다"” 참조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79636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7회말] 가득염의 노트”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38314


특히 가득염은 2007년 한국시리즈 전 경기(6경기)에 등판, 이종욱, 김현수를 주로 상대해 6경기 4 1/3이닝 무실점 1피안타 0사사구 3탈삼진의 완벽투를 펼쳐 신인 시절이던 1992년 이후 15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가득염은 2007년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에서도 일본시리즈 우승팀 주니치 드래곤즈 강타선을 1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막아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팀 상대 승리(6대 3 승리)도 이끌었습니다.

2007년 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투수, 2007년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일본전 승리투수 김광현이 “특히 가득염 선배님이 많이 가르쳐 주셨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시리즈, 코나미컵, 한일클럽챔피언십 한일전 기록

http://blog.paran.com/law/34709439)

2008년에도 가득염은 60경기 32 2/3이닝을 던졌고, 특히 2008년 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투수(1 1/3이닝 무피안타 1볼넷 무실점)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9년 가득염은 부진했지만, 통산 779경기 출장으로 조웅천(813경기, SK와이번스, 은퇴), 류택현(795경기, LG트윈스)에 이어 투수 최다경기 출장 3위를 기록했습니다.

2010년 가득염은 (송진우의 은퇴로) 프로야구 최고참 선수가 되었습니다.

생일이 약 4달 빠른 프로야구 최고령 선수 양준혁(삼성 라이온즈), 생일이 약 2달 빠른 구대성(한화 이글스)은 모두 1993년에 프로야구에 데뷔했습니다.

반면 가득염은 1992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습니다.

가득염은 18년 전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우승 당시 롯데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중 유일한 현역 선수입니다.




12. 재일교포 김성근 감독(1942년 12월 13일~ )


아버지(김찬숙), 어머니(이계수)의 고향은 경상남도 진양군(현 진주시) 미촌면 두메산골이었습니다.

혹독한 일제강점기 징용(강제노동)으로 일본 교토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12월 한 겨울, 6평도 안 되는 집에 3남 4녀 중 6번째로 아들(김성근)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소위 노가다 막노동을 했습니다.

김성근과 막내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일을 나갔지만, 감자도 먹지 못해 굶는 일이 많았습니다.

김성근의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기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고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 해 여름 김성근은 배가 고파 물을 너무 많이 마셔 복막염에 걸렸고 3개월 간 죽을 고비를 맞았습니다.

병원에 갈 돈도 없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배달, 생선가게, 공사판 등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반찬 없이 맨밥에 간장만 뿌린 도시락을 민망하게 먹어야 했습니다.

조센진이라며 교탁 밑 방공호에서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1958년 나니와상고 4번 타자 장훈(일본 프로야구 유일의 3000안타 기록. 3085안타, 504홈런, 319도루, 타율 0.319, 1676 타점)이 재일교포 야구단으로 봉황기 고교야구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1년 뒤인 1959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김성근은 봉황기 고교야구에 재일교포 야구단으로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고 한국을 방문합니다.

투수이자 내야수였던 김성근은 이 대회에서 재일교포 팀의 14승 1무 2패를 이끌며 스타가 되었습니다.

김성근은 1960년 귀국(귀화가 아님. 김성근 감독은 단 한 번도 일본 국적을 가졌던 적이 없음.)해 동아대, 교통부, 기업은행 투수로 노히트노런, 20승, 9연속완투 등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재일교포 고등학교 선수들이 재일교포 자격으로 출전한 봉황대기 경기 중,

“왜 외부인한테 우승기를 뺏겨야 하느냐. 스트라이크 존 잘 잡아줄 테니까 맘 놓고 치라.”라고 발언한 심판들, 야구인들과,

“반쪽발이”, “쪽발이”, “일본으로 돌아가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야구팬들의 벽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고 불렸던 재일교포들은 영구귀국 후에는 평생 쪽발이라고 불려야 했습니다.

(도쿄의 주일 한국 대사관, 오사카의 주일 한국 총영사관은 재일교포들이 기증한 금싸라기 땅에 세워졌습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재일교포들은 한국 선수단 경비로 1억 5천만엔을 보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도, 1997년 IMF 경제위기 때도 재일교포들은 엄청난 돈을 보냈습니다.

재미교포 혹은 미국 시민권자는 부러워하는 사람, 심지어 원정출산을 하는 사람들이 재일교포들은 쪽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며 돌팔매질을 당했던 김성근 감독은, 한국에서는 쪽발이라고 날계란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 원로 심판은 “공식적으로 김 감독을 상대로 편파 판정을 한 적은 없으나, 비공식적으론 꽤 된다.”며 미안한 뜻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한 번도 일본국적을 가진 적이 없고, 국가대표 선수, 국가대표 코치, 20년 가까운 프로야구 팀 감독 등 우리나라에서만 50년 넘게 야구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발음은 경상남도 사투리(부모님 고향 경상남도 진양군, 현 진주시)가 주축이 된 재일교포 발음에 나이와 작은 목소리, 발화구조 등이 결합된 것입니다.

특히 충암고등학교 감독 시절 타격 지도에 너무 몰입해 알루미늄 배트의 스윙 궤적에 들어갔다가 앞니가 다 빠져 모두 틀니로 대체하였습니다(당시 김성근 감독의 충암고등학교 제자 중 한 명이 기아 타이거즈 조범현 감독입니다.).

김응룡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그런데 요즘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그때(1960년 동아대 선수 김성근)보다 한국말을 더 못해. 의문이야.”라고 말한 것도 설명이 됩니다.

재일본야구협회 회장,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을 지냈고, 1957년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 일본시리즈 우승선수로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선수였던 한재우씨는, “김 감독의 일본어는 더 심하네. 한국말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다고. 목소리가 작은데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한단 말이지. 누가 그러더군. ‘김 감독의 혀가 짧아서 그렇다’고.”, “김 감독은 여기 일본에서도 대우를 해주는 야구인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반쪽발이’냔 말이지. 말이 없어 냉정해 보이지만 참 인정이 많은 이야. (혼잣말로)다시 태어나면 부모님께 그래야겠어. ‘아버지, 어머니 꼭 제가 태어나고 싶은 곳에 낳아 달라’고 말이야.”라고 말한 것도 연결됩니다.


한 한국시리즈 우승감독은 “일본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지”하며 김성근 감독을 비꼬았습니다.

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은 표준어를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발음할 수 있을까요?

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은 틀니를 쓰는 지방출신 노인이 사투리를 쓰면 상대방이 대통령이든 KBO총재든 “~도가 자랑스러운 모양이지”하며 비아냥거릴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역감정, 지역차별을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감독은 왜 아직도 표준어를 못 쓰고 사투리를 쓰는 거야”, “~감독 야구는 ~도 색이야”라는 식의 글은 찾기 힘듭니다.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심지어 신문기사에서도 “~감독은 왜 아직도 한국말을 못하는 거야”, “~감독 야구는 왜색이야”, ‘일본야구’, ‘왜색 야구’라는 식의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성근 감독 야구, SK와이번스 야구가 일본야구, 왜색야구, 쪽발이 야구라면, 그렇게 기사를 쓴다면,

평안남도 이북 출신으로 한국 전쟁 무렵 내려온 김응룡 감독 야구, 해태 타이거즈 야구는 북한야구, 적색야구, 빨갱이 야구라고 말하고 기사를 써야 할까요?

재일교포 자본인 롯데 그룹의 계열사로, 미국인 로이스터 감독이 지휘하는 롯데 야구는 오키나와 야구인가요? 하와이 야구인가요?

징용(강제노동)으로 경상남도 고향을 떠난 부모님을 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영구귀국해(귀화가 아님, 김성근 감독은 단 한 번도 일본 국적을 가진 적이 없음) 국가대표 선수, 국가대표 코치, 20년 가까운 프로야구 팀 감독 등 우리나라에서만 50년을 야구인으로 살았고 체육훈장까지 받은 김성근 감독이 쪽발이라면,

일본 프로야구 유일의 3000안타(3085안타), 504홈런, 319도루, 타율 0.319, 1676 타점을 기록하고도 끝까지 귀화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살아온 장훈은 한국인인가요? 쪽발이인가요?

박찬호와 결혼한 재일교포 3세 박리혜씨는 한국인인가요? 쪽발이인가요?

재일교포 3세 어머니를 두고 미국에서 자라는 박찬호의 자녀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어린나이부터 계속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백건우, 정경화, 사라장(장영주), 장한나 등의 음악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탈북자들은, 혹은 통일 후의 북한 출신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직업을 갖든 ‘북한~’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하나요?

인종차별, 조센진 발언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김성근 감독이 왼손 원포인트 릴리프를 우리 프로야구에 처음 도입했을 때, 야구계는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를 “치사한 일본식 야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투수교체를 하든, 치고 달리기를 하든, 번트를 하든, 고의4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일본야구”라고 앵무새처럼 해설했습니다.

그러나 왼손 원포인트 릴리프는 메이저리그를 포함해 전세계 야구의 가장 기본적인 전략입니다.

‘치사한 일본식 야구’가 전세계 야구를 식민지로 삼은 것인가요?

야구의 발상지, 메카는 일본인가요?

아니 “치사한 일본식 야구”라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사실은 누구보다 일본야구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인가요?


2009년 조범현 감독의 기아 타이거즈는 6인 선발 로테이션을 운영했습니다.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는 5인 선발 로테이션이 일반적이고, 6인 선발 로테이션은 일본 프로야구 특유의 제도입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칸베 토시오 코치, 스기모토 타다시 코치 등 일본인 투수코치도 기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아 타이거즈를 향해 “치사한 일본식 야구” 운운하는 사람들은, 기사들은 없었습니다.


메이저리그를 포함해 전세계 야구의 가장 기본적인 전략인 왼손 원포인트 릴리프는 “치사한 일본식 야구”로 비난했으면서, 일본 프로야구 특유의 6인 선발 로테이션은 “치사한 일본식 야구”“일본식 야구”도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떠오르는, “내가 하면 선진야구 김성근이 하면 치사한 일본식 야구”입니다.

“내가 하면 선진야구 한국인이 하면 치사한 조센진 야구”, “내가 하면 선진야구 동양인이 하면 치사한 원숭이 야구”도 떠오릅니다.

특정 인종, 특정 민족, 특정 지역, 특정 출신, 특정 성별의 사람이 무엇을 하든 ‘치사한 ~인종(민족, 지역, 출신, 남성)’이라며 말하는 것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초등학생도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쉬운 일은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중세 마녀사냥, 궁예의 관심법을 숭상하고 자신이 마녀가 되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비판의 대상과 근거는, 사람이 아니라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 경향신문 이용균 기자의 “김성근 SK감독 “야구의 神은 없다… 이기기 위해 공부했을 뿐””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0301827341&code=980101

- 스포츠조선 최재성 기자의 “SK 김성근 감독의 '간장 도시락'”

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sports/200907/20090721/97u74104.htm

- 동아일보 김영준 기자의 “[김성근을 말하다] 김응룡 사장이 본 김성근” 참조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1030286

- 스포츠서울 이재국 기자의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참조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82127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85835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박동희의 야구탐사]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19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193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이연수 성대 감독이 말하는 'SK 우승비결과 김성근'”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118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매거진S] 한·일 야신(野神)의 대화 '야구는 하나다'”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66




13. 양준혁과 김성근 감독(2001년~2002년 LG트윈스 감독)


양준혁은 2009년 5월 9일 최다 홈런 신기록(341홈런)을 세운 후 기억에 남는 지도자, 야구관에 영향을 미친 스승으로 김성근 감독을 말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생각난다. 1년 함께 있었는데 LG 시절 무척 혼 많이 났다. 그 분과 같이 있으면서 야구에 혼을 심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배웠다. 1구 1구, 10대 0 게임에서도 최선을 다한다는 것. 뭐든 혼을 심으면서 나름대로 배웠다.”

“김성근 감독님으로부터는 혼을 배웠다. 선수생활하며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성근 감독님과 1년간 야구하면서 굉장히 많이 혼났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혼을 배웠다. 0-10으로 지더라도 1구 1구 혼을 심는다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김성근 감독님으로부터 야구에 혼을 싣는 것을 배웠다”


양준혁은 1993년부터 17년 넘게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양준혁이 김성근 감독과 함께 한 기간은 2001년 LG트윈스에서의 단 1시즌뿐이었습니다.


- 경향신문 안승호 기자의 “양준혁 “착실히 400호까지 치고 싶다”” 참조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905102139316&sec_id=510201&pt=nv

- 일간스포츠 김성원 기자의 “‘홈런신기록’ 양준혁 “세리머니 잊지말자 하며 돌았다”” 참조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143883

- 스포츠서울 홍헌표 기자의 “삼성 양준혁 "지난해 세웠어야 할 기록이었다"” 참조

http://www.sportsseoul.com/news2/baseball/pro/2009/0510/20090510101010100000000_6953976966.html

- OSEN 손착익 기자의 “'홈런 신기록' 양준혁, "장종훈 선배께 영광돌리고 싶다"”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2024609




14. 김성근, 김성근 감독(1942년 12월 13일~ )


“감독님은 야구에 한이 맺힌 분 같아요. 모든 일상이 야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사생활도 있지만 감독님은 그런 것도 없는 분입니다. (야구가) 잘 되면 더 잘하려고 고민하고, 안될 때는 빨리 헤쳐 나오려고 고민하시는 분입니다. 항상 긴장 속에 살고 있다고 할까요. 한마디로 야구에 ‘미친 분’ 아닐까요(웃음). 그렇다고 절대 깐깐한 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선수들을 위해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폭소탄’을 터뜨리시기도 합니다. 선수들을 일일이 체크하는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 박경완 (SK와이번스 선수)

“내 인생의 멘토는 김성근 감독이다.”

“일흔이 넘은 연세인데다 50년 이상을 야구만 보고 사셨는데도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 하신다. 아무리 어린 선수가 들어오더라도 그 친구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배우기 위해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곘다. 고리타분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발상 자체가 남들과 다르다. 머물러 있기를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 그런 모습을 통해 많은 걸 배우게 된다. 나는 내 자신을 가장 많이 연구하지만 그 외에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에 대하 가장 많이 연구한다. 정말 끝이 없는 분이다.”

- 양준혁 (해설위원, 전 삼성 라이온즈, LG트윈스, 해태 타이거즈 선수, 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최다타점, 최다안타)

“김성근 감독님께서 쏟으셨던 야구에 대한 열정과 고뇌, 그리고 인내에서 야구의 진실과 깊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 박찬호 (메이저리그 투수)


“감독님은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힘이 있다. 그 앞에선 절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다. 그건 몇 년 겪어봐선 모른다. 긴 시간을 함께 하면 감독님의 믿음이 얼마나 굳은 심지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간혹 무섭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감독님을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무서울 것 하나 없다. 모두 함께 이겨나가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결과가 나오면 공은 선수들과 코치들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신이 지는 인생을 살아오셨다. 아랫사람을 위해 정말 헌신하는 몇 안 되는 지도자가 바로 김성근 감독이다.”

“감독과 코치로 한솥밥을 먹으며 답답했을 때가 적지 않았다. '조금만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마 감독님이 타협하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짤리는 일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직접 말씀드린 적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미국과 일본처럼 야구인이 대접받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 더 독하게 하셨던 점도 있었다. 감독님 덕분에 야구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됐다.”

- 계형철 (SK와이번스 2군 감독, 1984년 14승, 1985년 11승, 1988년 10승 등 OB베어스에서 10년 간 69승 89패 9세이브 방어율 3.43)


“내가 프로에 들어와서 야구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 분이 김성근 감독님이다.”

- 박용택 (LG트윈스 선수)


“야구인 중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사실 이번 연수를 결정하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도 김성근 감독님 때문이다. 감독님을 보고 있으면서 '저렇게 나이든 사람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하는데'라는 감탄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다. 때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는 모습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젊은 코치로서 정말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김성래 (삼성 라이온즈코치, 전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SK와이번스 선수, 1993년 MVP, 1987년 홈런왕, 1993년 홈런왕)


“당시 무척 힘들었지만 1999년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야구만 생각하는 감독님을 보니 그 열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야구에 인생을 거신 분이다. 감히 나와 비교할 수 있겠나.”

“감독님은 야구가 있으면 전국 어느 곳에나 가신다.”

“워낙 야구 외적으로 제자들을 배려해주시고 끝까지 신경 써주신다, 내게는 참 스승이시다.”

-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야구에 눈뜨게 해준 분이다. 잔정이 많다. 감독님은 겉으로는 강하신 것 같지만 내면으로는 여린 분이다. 아마 배웠던 선수들은 모두 아버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면 모두 그렇게 이야기한다.”

- 오봉옥 (전 한화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기아 타이거즈 선수, 1992년 13승 0패 승률왕)


“김성근씨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길을 가다가 동네꼬마가 야구배트와 야구공을 만지는 모습만 봐도 투구폼과 타격폼을 지도할 정도이니. 야구에 장인이 있다면 바로 그다.”

“김 감독 정도면 '참 스승'이라고 추천할 만 하다.”

“제자들에게 굉장히 깊은 정을 주고, 아마·프로 할 것 없이 야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 하일성 (해설위원, 전 KBO 사무총장)

“무명 선수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로 키우는 김 감독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님은 6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김 감독님이 했던 것처럼 인천 시정도 지역편중, 파벌 인사가 아닌 공정한 인사를 단행해 시 공무원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겠다.”(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 개표방송 인천시장 당선 인터뷰)

- 송영길 (인천시장)

“감독님은 선수를 보이지 않는 데서 칭찬해요. 절대 앞에선 안 해. 그렇게 선수 위하는 마음을 우리도 다 알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 믿고 따라가면 된다는 믿음을 줘요. 그것이 카리스마지. 정말로 결과가 나오니까. 내가 야구 좀 잘 한다고 뻐겼다간 감독님 앞에서 큰 코 다치지.”

“돌이켜보면 최창호나 박정현, 저 전부 가공이 안 된 선수였잖아요? 감독님이 잠재능력 하나만 보고 매달린 것 같아요. 그 사람이요, 무턱대고 아무나 그렇게 훈련시키는 거 아니에요.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인데. (극한훈련엔) 키울 만한 선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정명원 (넥센 히어로즈 코치, 1989년 11승, 1991년 12승, 1998년 14승 등 통산 75승 54패 142세이브, 방어율 2.56,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 노히트노런)

“김성근 감독님을 만난 이후 야구에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 김재현 (전 LG트윈스, SK와이번스 선수)


“재현이가 처음 주전에서 제외됐을 때는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난해부터는 본인이 야구를 즐기고 있다고 얘기해. 주전이 아니면 어때. 운동장에서 야구를 즐기고 있잖아.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그 열정을 찾은 거지”

“재현이가 김성근 감독님 이야기를 많이 해. 우리나라에 그렇게 야구를 많이 아는 사람은 없다고.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신도 그렇게 야구를 사랑하겠다고.”

- 김웅용 (김재현의 아버지)


“프로 선수들은 왠지 치열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올 초 SK의 일본 캠프를 가서 깜짝 놀랐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훈련을 하더라. 내가 너무 게으른 것 같아 반성을 많이 했다.”

“대화를 나눠보고 그간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서 감독님의 야구에 대한 열정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김성근 감독님은 고약한 세상에서 학연이나 지연 없이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정상에 올랐고,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감독님에게 안티 팬이 너무 많아 요즘 마음이 아프다. 곁에서 보면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다. 정말 인자하고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 장미란 (국가대표 역도선수)


“김 감독은 여기 일본에서도 대우를 해주는 야구인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반쪽발이’냔 말이지. 말이 없어 냉정해 보이지만 참 인정이 많은 이야. (혼잣말로)다시 태어나면 부모님께 그래야겠어. ‘아버지, 어머니 꼭 제가 태어나고 싶은 곳에 낳아 달라’고 말이야.”

- 한재우 (전 재일본야구협회 회장, 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 1957년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 일본시리즈 우승선수,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선수)


“온갖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야구장으로 달려가는 그는 진정한 야구인이다.”

- 김인식 (전 한화 이글스 감독)


“내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은 SK 와이번스의 김성근, 한화 이글스의 김인식 감독”

“김성근 감독은 항상 야구장에 있으면서 2군 선수들에 대한 소식을 단순히 전해 듣기보다는 직접 체크한다.”

“또 어떤 야구인보다도 선수를 아끼고 존중한다. 쉽게 선수를 버리거나 함부로 과소평가, 평가절하 하지 않는다.”

- 마해영 (해설위원, 전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기아 타이거즈, LG트윈스 선수, 통산 타율 0.294, 260홈런 1003타점 1609안타)


“1960년 내가 초등학생일 무렵에 동아대 선수로 뛰던 김성근 감독을 처음 보았다. 그때부터 2007년과 2008년 한국시리즈를 재패하고 헹가래를 받는 모습까지 마치 흑백 필름처럼 나의 뇌리 속을 스쳐간다. 숱한 고난과 견제를 극복하고 야신으로 우뚝 선 그는 역경을 이겨낸 인물의 표상이다.”

- 허구연 (해설위원, 전 청보 핀토스 감독)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다. 예전에 쌍방울부터 시작해서 LG를 거쳐 SK까지 왔다. 구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노력하면서 반전 꾀하고, 자기 신념을 지켜내면서 SK 지휘봉을 잡아 성공했다. 인생의 굴곡을 잘 넘긴 '야신'이다.”

- 김성모 (만화가)

“SK 김성근 감독과 한화 김인식 고문의 책을 즐겨 본다.”

- 이숭용 (넥센 히어로즈 선수)

“한 명만 꼽는다면 프로야구 SK 김성근 감독님이야. 매스컴을 통해서만 접했지만 참, 묘한 매력을 지니신 것 같아. 기회 되면 꼭 뵙고 싶어.”

- 신치용 (프로배구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 “시즌 끝나면 허심탄회하게 술 한 잔 하고 싶은 지도자가 있나요?”라는 질문에, 김 감독의 남다른 리더십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결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실력이 부럽다는 이유를 들며)

“호주에 다녀오면서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을 3번 읽었는데 감명을 받았다. 선수들을 운동 기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느낌있는 아이들로,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마인드 변화를 통해 팀을 응집시키고 강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철학과 비슷하다. 가혹한 훈련이라도 훈련의 의미를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내 생각과 일맥상통하다.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고 선수들이 스스로 느끼게끔 하는 것. 하나를 제시하면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통했다.”

- 안익수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 감독)

“김성근 감독 존경한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선수들에게 프로가 가져야 할 자세를 잘 가르치시는 것 같다. 강도 높은 훈련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이 이해하고 따르게 만드는 게 바로 김 감독님의 능력.”

- 신선우 (프로농구 서울 SK 나이츠 감독)

“프로야구 SK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의 지도법을 닮고 싶다. 김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훈련을 많이 시킨다고 들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만큼 냉정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결국 SK는 늘 성적으로 결과물을 보여줬다. 세상에는 공짜도 없고, 쉬운 것도 없다. 최근 김(성근) 감독의 ‘감독이 선수를 사랑하는 길은 그들이 좋은 성적을 내도록 도와 연봉을 많이 벌게 해주는 것’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 황선홍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 감독)

“제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프로야구의 김성근 감독님이에요. 셀 수 없이 많이 경질됐는데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70대에도 감독으로서 인정을 받고 있잖아요. 저도 두 번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김성근 감독님과 같은 근성을 보여주고 싶어요.”

- 김태환 (전 프로농구 서울 SK 나이츠 감독)

“김성근 감독님을 만나고 모든게 달라졌다. 내가 훈련을 많이 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 그때부터다. 하루에 6,000개 7,000개를 치는 날도 있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넘어보니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렇게 하고도 못하는 게 말이 되냐'는 독기가 생겼다.”

- 최동수 (LG트윈스 선수)


“예를 들어 목욕할 때 손가락 피부가 물러지지 않도록 왼손은 물에 담그지 않는다든지, 시즌 중에 손톱깎이와 두 종류의 사포, 반창고 등을 필통에 넣어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공을 던지는 검지와 엄지는 매일 사포로 갈았어요. 손톱깎이로 깎다가 자칫 상처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이건 김성근 감독의 영향이 큽니다. 예전 태평양 감독으로 계실 때 선수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TV로 봤거든요. 그걸 보고 나도 따라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송진우 (전 한화 이글스 선수, 초대 선수협 회장, 통산 최다승 210승, 통산 최다이닝 3003이닝, 통산 최다 탈삼진 2048탈삼진, 은퇴 선언 후 인터뷰에서 철저한 자기관리를 묻는 질문에 대해)


“김성근 감독님은 야구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셨다. 기술적인 면을 일깨워줬고 야구 외적인 면 특히 인간적인 면에서 도움을 줬다. 믿음이다. 서로 신뢰한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 최태원 (기아 타이거즈 코치, 1000경기 연속출장 기록 달성 후 도움을 줬던 분들을 말하며)

“SK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타자가 번트를 실수하거나 투수가 실투할 때, 그 선수한테 책임을 묻고 나무라면 편하게 잘 수는 있지만 그렇게 안한다고 했다. 투수가 실투했으면 그전에 바꿔줬어야 하는데, 번트를 못 댔으면 번트 연습 한 500개 미리 시켰어야 하는데라고 자기를 나무란다고 한다. 이 얘기 듣고 누구 탓 할게 아니라 환경이 바뀌었는데 우리가 대처를 제대로 못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조신 (SK브로드밴드 대표이사 사장)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으로부터 경영 기법을 배우겠다.”

“김 감독은 상상할 수 없는 강훈련을 시키면서도 긍정적인 조언으로 선수 사기를 올렸다.”

- 이석채 (KT회장, 통합 KT 출범식 기자 간담회에서)

“SK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똑같은 야구를 해도 그들은 너무 재미있게 야구를 한다.”

- 정수근 (전 롯데 자이언츠, 두산 베어스 선수, 1998년~2001년 4년 연속 도루 1위)


“특별히 SK로 가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SK 선수들이 제일 자유스러운 것 같아요.”

“그게 말로 표현하긴 어려운데. 어쨌든 선수 입장에선 참 자유로운 팀이에요. 하지 말라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김성근 감독님을 만나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 안경현 (해설위원, 전 두산 베어스, SK와이번스선수)

“정말로 오랜만에 최고의 피칭 연습 투구를 봤다면서 고맙다고 말했던 게 언론에 한 번 났다. 나도 되게 뿌듯했다. 김성근 감독은 어떤 선수나 존경하니까.”(GQ 2010년 2월호 인터뷰, “김성근 감독이 누군가에 대해 그렇게 칭찬하는 건 참 드문 일인데, 당신 연습 투구를 보면서 모든 투수가 당신 연습 투구를 보고 본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는 질문에)

“제가 감독님 밑에서 뛰고 있다면 선발, 중간, 마무리 중 어떤 보직을 맡기실 건가요. 만약 선발이라면 몇 선발로 쓰실 건지 알려주세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2010년 8월 16일 스포츠조선 10대 1 인터뷰 김성근 감독편)

- 봉중근 (LG트윈스 선수)

“김성근 감독이야말로 야구를 가장 순수하게 사랑하는 지도자”

“김성근 감독님 같은 분 밑에서 야구를 한 번 해보고 싶다.”

- 최익성 (탤런트, 전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LG트윈스, 기아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SK와이번스 선수, 1997년 타율 0.296 22홈런 33도루 65타점 107득점)

“감독님은 사실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많은 관심을 주셨고 그만큼 많이 아껴주셨다.”

“감히 말하지만 감독님은 한국야구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 사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정말 야구밖에 모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 박정현 (전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쌍방울 레이더스, SK와이번스 선수, 1989년 역대 신인 최다승 19승, 방어율 2.15 신인왕, 1989년부터 4년 연속 10승)

“아마도 그분은 죽을 때까지 야구를 하고 계실 거예요. 지금은 저도, 애들도 남편이자 아버지의 그 모습에 존경심을 갖습니다.”

- 오효순 (김성근 감독의 아내)


“만약 IMF가 오지 않았다면 김성근이 쌍방울에서 한국시리즈 우승했을 거야.”

- 이용일 (전 쌍방울그룹 부회장)


“김성근 감독님은 또 다른 아버지”

“김성근 감독님은 내게 야구는 돈을 받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스승”

- 양승학 (한화 이글스 선수)


“사장님께서 얼마전 잘랐던 김성근감독 말입니다. 그는 저에게 야구뿐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 장환수 (동아일보 기자, 2002년 11월 김성근 감독 경질 후 “LG 어윤태 사장님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내가 상대한 감독(LG 김성근)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다.”

“(약한 전력으로) 어떻게 야구를 저렇게 한단 말인가. 김성근 감독은 야구의 신이 아닌가.”

- 김응룡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김성근 전 감독에게 영광을 돌린다.”

- 양상문 (롯데 자이언츠 코치,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당신야구는 김성근야구지, LG야구가 아냐.”라며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 LG트윈스 구단 관계자들이 참석한 모 시상식에서 LG트윈스 투수코치로 지도자상을 받으며)


“그는 양보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야신이라 하지만 그 스스로 야구의 광신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라운드를 벗어나면 온화하고 배려 깊은 어르신이다.”

- 조종규 (KBO 심판위원장)


“교토 노인리그에 우리 학교(가쓰라 고교)가 참가하고 있는데 에이스가 없어 고전중이다. 빨리 건너와라. 우리 팀 목표는 우승이다.”

- 가쓰라 고등학교 동창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도 LG트윈스 감독직에서 중도경질 된 후 낙담했던 김성근 감독을 두 번째로 웃게 한 전화 통화)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생각해왔다. 지방 광주에 계시는 아버지와 오래 떨어져 있어 감독님한테서 부모님의 그리움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감독님이라 생각했으면 장난치거나 어깨를 주물러 드릴 상황이 안됐을 것이다.”

“내가 봐온 감독님은 야구 밖에 모른다. 지금 뒤늦게 야구장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전까지는 너무 힘들어하셨다. 솔직히 그런 감독님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주위 평가가 못 따라줘 너무 억울하겠다 싶었다. 그것을 이겨냈고 야구 밖에 몰라 안타까웠다. 감독님은 절대 먼저 사람을 버릴 분이 아니다.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짐을 먼저 벗어드리고 싶었다.”

- 조웅천 (전 SK와이번스, 현대 유니콘스, 태평양 돌핀스 선수, 813경기 투수 최다경기 출장 기록, 64승 54패 89홀드 98세이브)


“책도 책이지만 정말 되고 싶은 지도자상이 있다. 한국에서 김성근 SK 감독님과 주루면 주루, 타격이면 타격, 수비면 수비에 관해 폭넓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야구인이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나는 많지 않다고 본다. 그 가운데 나는 김 감독님과 야구이야기를 했을 때 지치지 않고 내 의견을 밝힐 수 있을 만큼의 공부는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장 지도자라고 연구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야구는 마술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야구가 처음 날 찾아왔을 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야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노력하면 발전한다고.”

- 이정훈 (천안북일고등학교 감독, 1987년 신인왕, 1991년, 1992년 2년 연속 타격왕)

“감독님, 보고 싶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습니다.”

- 이상훈 (전 LG트윈스, SK와이번스 선수, 1995년 20승 5패 방어율 2.01, 통산 71승 40패 1홀드 98세이브 방어율 2.56)


“내게 야구에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아버지라면, 김성근 감독님은 야구에 대한 열정을 가르쳐주신 분이다. 감독님과, 그리고 이 팀에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사실 오늘 매고 온 넥타이는 김성근 감독님께서 손수 골라주신 것이다. 감독님이 ‘이제 너는 내게 멱살잡혔다’고 농담하셨는데 정말로 감독님께 많은 보답을 해드리고 싶고, 통산 2000승 달성도 도와드리고 싶다.”

- 김광현 (SK 와이번스 선수)




15. 우공이산의 오뚝이 김성근 감독(1942년 12월 13일~ )


프로야구 감독직을 맡은 첫 해인 1984년 김성근 감독은 종합 승률 1위(승률 0.586)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전기리그 우승팀 대 후기리그 우승팀 간의 한국시리즈 방식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승률 0.550, 김영덕 감독)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9월 22일, 23일 마지막 2경기에서 져주기 게임(져주기 경기)을 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는 OB베어스를 상대로 9승 11패의 열세를 보였고, 특히 3일 전 9월 19일 대전에서 에이스 김일융을 선발로 투입하고도 0대 11로 패했습니다.

반면 삼성 라이온즈는 전기리그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9승 1패로 기록했습니다.

김영덕 감독은 OB베어스(승률 0.586, 김성근 감독) 대신 롯데 자이언츠(승률 0.510, 강병철 감독)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삼성 라이온즈는 9월 22일 경기는 7대 0, 9월 23일 경기는 3대 0으로 앞섰지만, 잘하는 선수 교체하기, 날아오는 공 잡지 않기, 일부러 주루사하기 등의 연극으로 9대 11 역전패, 8대 15 역전패를 했습니다.

어이없는 결과에 김성근 감독은 박용곤 구단주와 함께 밤새 술을 마시며 쓰러졌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감독 첫 해 종합 승률 1위를 하고도, 제도상의 문제와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 경기가 결합되어 결과적으로 한국시리즈 직행은커녕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실패했습니다.


2년 뒤인 1986년 김성근 감독은 OB베어스를 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전년인 1985년까지의 포스트시즌 방식에 의하면 OB베어스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해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와 한국시리즈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 삼성 라이온즈의 통합 우승으로 변경된 제도는, 해태 타이거즈를 승자로 만들고, 삼성 라이온즈와 OB베어스를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전기리그 2위 팀이자 후기리그 2위 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종합 승률 1위 팀도 아니었지만,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습니다.

대신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와 후기리그 우승팀 OB베어스는 플레이오프를 했습니다.

그러나 OB베어스는 정규시즌 후 보너스를 요구하는 선수들(1983년 MBC청룡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보너스 문제로 내홍을 겪는 등 현재의 포스트시즌 후 보너스 관행과는 달랐습니다.)과 임의탈퇴를 요구하는 구단의 갈등을 겪었고, 5전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앞서고도 2연패해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OB베어스는 1987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상대는 1986년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였습니다.

1986년에 이어 1987년에도 5전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OB베어스는 2승 1패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아웃 주자 3루, 3대 2로 OB베어스가 앞선 상황,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이 유격수 쪽 내야 땅볼을 쳤습니다.

승리를 예감한 OB베어스 선수들이 뛰어나가려던 상황, OB베어스 유격수 유지훤은 평소와 다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 타구를 잡았고 1루로 던졌지만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 판정이 나왔습니다.

3대 3 동점으로 연장전에 돌입했습니다.

OB베어스는 연장 10회말 1아웃 1, 3루 위기에서 만루 작전을 썼지만, 투수 최일언(SK와이번스 코치)이 폭투를 범하면서 4차전을 내주고 말았고, 결국 다시 2승 3패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습니다.


1987년 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아웃 OB베어스 유격수 유지훤의 수비 하나가 프로야구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1987년 기적적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해태 타이거즈는 또 다시 우승을 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6년부터의 우승 행진을 이어가 19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김성근 감독은 1987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고, 이는 1988년 시즌 중반의 사실상 감독 경질 수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10년 감독 운운했던 OB베어스 구단은, 1988년 시즌 중 감독 경질 여론을 만들기 위해 팬들에게 ‘김성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과 김성근 신임투표를 했고, 기자들에게 “올 시즌 끝나면 김성근도 끝난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습니다.

OB베어스 다음 감독이 고려대학교 출신이며 메이저리그에 유학을 다녀온 이광환 2군감독임은 공지의 사실이 되었습니다(OB베어스 이광환 감독은 1989년 승률 0.463를 기록했고, 1990년 15승 1무 30패 승률 0.333를 기록하고 중도퇴진 했습니다.).

선수들은 물론 김성근 감독마저도 그러한 소식을 듣는 상황에서 1988년 OB베어스는 간신히 5할 승률을 넘기는 데 그쳤고,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프로원년인 1982년부터 1988년까지 7년 동안 OB베어스에만 몸담았습니다.

1988년 당시 OB베어스 김성근 감독(1984년~1988년)은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1983년~1988년)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한 팀의 사령탑을 지킨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나 1988년 OB베어스와의 결별은, 대체적으로 최약팀을 그것도 2년 남짓만 맡는 김성근 감독의 험난한 감독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1989년 김성근 감독은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맡았고,

1996년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맡았습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는 (다른 팀들은 매각, 인수가 없이 굳건히 유지되는 상황에서)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2번이나 매각, 인수를 겪은, 1982년 창단 이후로 ‘꼴찌, 3위(1983년 장명부 30승 6세이브, 427 1/3이닝), 꼴찌, 꼴찌, 6위 꼴찌, 꼴찌’로 7년간 5번의 꼴찌를 하며,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던 꼴찌팀이었습니다.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8개 구단 중 가장 늦게 창단된 구단이면서도 처음으로 해체될, 8개 구단 중 가장 전력이 약하면서도 가장 돈이 없는, 1990년 창단 이후로 (8위), 7위, 8위, 7위, 8위, 8위를 한 꼴찌팀이었습니다.

포스트시즌 진출 자체가 기적인 표류선, 난파선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구단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어울리는 오대산 지옥훈련을 하고, 선수들 숙식비용을 위해 사비를 털고, 잠도 못자고 새벽까지 전력분석을 하고, 신장암에 걸려 콩팥 제거 수술까지 받고서도 담석이라고 둘러대고 바로 야구장으로 돌아와 하루에 1000개씩 펑고를 쳤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그렇게 태평양 돌핀스도 쌍방울 레이더스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습니다.

인천(경기, 강원)팬들도, 전주(전라북도)팬들도 포스트시즌이라는 것을 처음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약한 전력이지만 이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 있겠다고 판단할 무렵, 그러나 그 감독자리마저도 임호균 각서 파동, 쌍방울 모기업 부도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1991년 삼성 라이온즈(1982년 창단한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2년이 처음이었습니다.) 감독을 맡아 역시 포스트시즌 진출에 그쳤던 것과 더불어 ‘약팀을 강팀으로 만들 줄은 알아도 우승을 만들지는 못하는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김성근 감독에게 붙었습니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승승장구하던 조조군이 적벽에서도 승리했다면 삼국지는 삼국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근거지 없던 유비군이 촉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사라졌다면 삼국지는 삼국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승산 없는 싸움에 온 몸을 바쳐 오장원의 별이 되지 않았다면 삼국지는 삼국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갈량도 통일을 하지 못했으니 루저(loser), 사마염은 통일을 했으니 위너(winner)’라는 식의 우승제일주의에 따르면, 통산 최다승 2위라도 꼴찌 팀, 비인기 팀, 가난한 팀을 주로 맡은, 무엇보다 우승하지 못한 팀을 맡은 김성근 감독은 분명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001년 9승 25패의 압도적 꼴찌팀이었던 LG트윈스를 감독대행으로 맡아 5할 이상 승률을 거두고, 2002년에는 현대 유니콘스, 기아 타이거즈를 물리치고 우승만큼이나 감동적이었던 준우승을 차지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을 기다린 것은, “당신야구는 김성근야구지, LG야구가 아냐.”라는 어윤태 LG트윈스 사장(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청장)의 중도경질 통보였습니다.

고관절무혈괴사증으로 선수생명이 위태롭던 대타 김재현이 2타점 2루타성 타구를 치고 절뚝거리며 1루에 갔던, 2002년 LG트윈스의 마지막 경기 후 보름도 지나지 않은 2002년 11월 23일의 일이었습니다.

이상훈 등 선수들이 반발하고, 강추위 속에서 많은 팬들이 버스까지 동원해 그룹 본사와 농구팀 경기장에서 “‘정도 경영’ 추구해온 LG 그룹, 야구단은 ‘독재 경영’, 어윤태 사장, 유성민 단장 당신들은 팬들의 참뜻을 아느냐!”, “우승을 못하면 짤리니 꼭 우승하라.”는 플래카드를 거는 등 항의를 했지만,

어윤태 LG트윈스 사장(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청장)은, 2002년 7위에 그쳐 한화 이글스와 재계약을 하지 못한 고려대 2년 후배 이광환 감독을 LG트윈스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중도경질을 당한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이, OB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트윈스의 거의 모든 전현직 선수들, 코치들 등 100명이 넘는 많은 야구인들로 가득 채워졌지만, 김성근 감독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낙인이 찍혀 있었던 김성근 감독은 20년 가까이 마지막 족쇄를 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성근에게 야구는 생명이었습니다.

보수도 받지 않고 지하철에서 3시간을 보내고 지방원정까지 다니며 자비로 학생 야구, 사회인 야구를 지도했습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나이든 자신을 알아보는 야구팬을 만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박찬호, 이승엽, 김병현 등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해 기량을 향상시켰지만,

메이저리그와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오랜 감독 생활을 한 발렌타인 감독이 코치로 부르고, 유달리 직언을 많이 했던 김성근 감독과 헤어지며 “당신은 최고입니다.”라는 사인을 선물했지만,

김성근 감독의 낙인은, 꼬리표는, 족쇄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인천(경기, 강원)에서, 첫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한국시리즈, 1승도 하지 못하고 리오스, 랜들 두 외국인 선수에게 2연패를 했습니다.

한국시리즈 0승 2패에서 우승을 차지한 팀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한 팀도 없었습니다.

한국시리즈 시작 전부터 질 거라고 예측했던 많은 전문가들은 끝났다고 했습니다.

간신히 1경기를 이겼지만 4차전 상대 선발투수는, 한국시리즈 1차전 완봉승까지 포함시키면 2007년 SK와이번스 전에서 6경기, 49이닝(경기당 8.17이닝) 1자책점, 방어율 0.18, 5승 1패를 한, 2007년 방어율 2.07(1위), 22승(1위) 5패, 탈삼진 147개(2위), 승률 0.815(1위), 234 2/3이닝(1위), 투구수 3566개(1위), 6완투(1위), 4완봉(1위), WHIP 1.06(1위)의 MVP, 골든글러브의 골리앗 리오스였습니다.

규정이닝도 채우지 못한 3승 7패의 19살 신인투수(김광현)를 내보냈습니다.

모두들 포기하는 경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 김광현이 골리앗 리오스(한국시리즈 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리오스는 2008년 5월 실시한 검사에서 두 번 모두 스테로이드가 검출되어 1년 출장정지 처분을 받고 방출, 선수생활을 마감했습니다.)를 이겼습니다.

그렇게 4번 연속 이겼습니다.

2패 후 4연승, 확률 0의 불가능한 기적으로 우승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팀을 꺾었습니다.

3승 7패 19살 투수를 한국 프로야구 MVP로 만들고 또 우승했습니다.

10승 투수 하나 없던 6위 팀을 맡아 16연승, 22연승, 4년 연속 6할 승률이라는 전인미답의 신화를 썼습니다.

감독 첫 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김성근 감독의 꼬리표는 족쇄는, 20년이 지나서야 65살이 되어서야 지워졌습니다.


“잡초? 그래. 난 잡초야. 잘려도 잘려도 살아나고, 밟혀도 밟혀도 뿌리가 뽑히지 않았으니까. 우승을 했지만 잡초가 어디 가겠어? 그러나 난 야구병신이야. 야구라는 병에 걸린 사람 말이야. 야구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세상에 야구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난 뭘 하며 살아갔을까? 야구는 평생 공부해도 몰라. 야구에 정답은 없고 끝도 없어. 야구공부 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있을 뿐이지.”


“내가 잘한 게 있다면 그건 선수들을 남의 자식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야.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있나. 아무리 아파도 걔들 훈련할 땐 빠진 적이 없어. 그러다보면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 내 마음을 알아준 선수들한테 고맙지.”


“남자는 자기가 걸어가고 나서 길이 생겨야 하는 법이에요.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그건 흉내라고.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해요. 물론 낯설고 무섭기도 하지. 다칠 때도 있고, 아프기도 할 거라고. 하지만, 그 속에 삶의 아이템이 있어요. 시행착오를 줄이려는 것보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요. 그렇게 살다보면 결국 길이 생깁니다. 그리고 나중엔 눈밭 위의 내 발자국을 보고 누군가 따라오는 걸 볼 수 있어요. 내가 살면서 ‘이것이 진실이다’ 애써 말하지 않는 이유에요. 누군가에게 길이 되면 그뿐이니까. 그게 남자가 사는 길이니까….”


“(야구는) 생명이지요. 야구가 있어서 지금까지 투쟁하며 살아왔고 올바르게 살아왔고 공부도 했어요. 만약 야구가 없었으면 벌써 죽었지 않나 싶어요. 목적이 없었을 테니. 나는 매일매일 생과 사에서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숨을 쉬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다른 사람과 내 인생이 그래서 다른 것일지 몰라요. 다른 이들은 그래요. “왜 그렇게 각박하게 사느냐”고. 야구란 건 늘 어마어마한 것을 가르쳐줘요. 야구는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인생하고 똑같은 것 같아요. 됐다 싶으면 아니거든. 더 있거든. 어쩌면 인생보다 더 힘들어요. 야구는 상대가 있으니까. 야구감독이란 건 하루하루가 승부에요. 이거 굉장히 힘든 거예요. 매일 싸움이에요. 거기서 느끼고 배우는 게 얼마나 많겠어요. 사람들한테 배반당하는 것도 있을 거고, 그것을 어떻게 이기느냐가 문제지요.”


“오늘 박 기자 컨디션이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50%인지 70%인지 몰라요. 하지만 난 그래요. 50%밖에 안 되니까 쉰다? 난 오히려 50%밖에 안 되니까 100%를 만들기 위해 50% 더 노력하자. 그거에요. 그게 성공하는 비결이에요.

여러분도 지금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땀을 믿으세요. 성공은 곧 노력입니다. 설령 노력했는데도 성공이 좌절됐다고 무릎 꿇지 마세요. 또 도전하세요. 그래도 안 되면 또 도전하세요.

저는 67살이 되도록 그걸 믿으며 살았고, 65살에 성공을 했어요. 좌절하려거든 절 보세요. 절…. 여러분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 스포츠서울 이재국 기자의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73&aid=0000085156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91120

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94146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박동희 in 캠프] 김성근 감독과의 대화”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209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의 “[박동희의 베이스볼 2.0] 김성근, “야구는 30cm의 미학””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23

-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의 “[김성근 장인 리더십-에필로그] 못 다한 이야기”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8&aid=0000540181

(이상 스탯티즈 기록 참조)


SK와이번스, 김성근 감독, 언론, 여론에 대한 20가지 화두

http://blog.paran.com/law/33099819 글의 참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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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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